
달빛귀로
By. 차닥
해가 지는 저녁 무렵, 낯선 단내가 풍겼다.
어두운 식당을 지나 깊은 안쪽. 다른 대장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4번대 대장의 개인 조리실은 늦은 시간에도 불이 밝았다.
오랜만의 불빛이었다.
두 손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컴컴한 어둠이 머무르던 곳에 불이 든 게 얼마 만인지. 발길이 끊어지다시피 하던 그곳에 금방 켠 촛대는 인적을 반기듯 밝게 빛나며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은 주방의 주인은 분주한 손길로 레시피를 고치고 만들고 고치는 것을 반복했다.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야 했다.
바쁜 움직임만큼 달그락거리는 소음에도 누구 하나 나와보는 이 없었지만 작은 주방의 주인, 삿치는 분주히 과자를 만들어내었다.
모비 딕의 모든 이들이 넉넉히 먹을 수 있을 만큼 많고 오래 먹을 수 있도록 유통기한을 조절한 모비 딕의 특제쿠키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늘어나 쟁반 위에 가득 쌓였다.
똑똑
늦은 밤 어둠을 가르고 울리는 소리에 의자에 앉아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를 더듬던 이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휘영청 밝은 달은 죽은 이가 드나드는 귀문이라 하던가.
죽은 자가 찾아와도 놀랍지 않을 깊은 밤.
문을 두드리는 것은 누구인가.
잠시 말문이 막힌 그가 입가를 더듬었다.
누가 들어오길 기대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술렁이는 마음을 내리누르는 사이 문이 열리고 삿치가 들어왔다.
노크는 예의상이었는지 답도 듣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삿치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리고 스스럼없이 맞은 편에 앉았다.
삿치의 움직임에 촛불이 일렁이고 삿치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깊어졌다
달빛이 가로지르는 테이블 위로 올린 손만이 희었다.
커다란 덩치와 눈가의 새겨진 상처로 인해 한층 더 거칠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단정한 손짓으로 쟁반을 덮고 있던 천을 걷어 올리자 찻잔에서는 금방 우린 것인지 따뜻한 김이 오르고 옆에는 먹기에도 아까울 만큼 아기자기한 쿠키가 소담히 담겨있었다.
진하게 우린 녹차의 향기가 달빛에 스몄다.
까다로우려면 한없이 까다로울 수 있는 그였지만 그래도 삿치가 우린 찻물은 짙으나 옅으나 달게 마셔주었다.
진하든 옅든 언제나 같이 내오는 다과와 더없이 어울리는 농도의 첫물이었기에 그는 삿치가 우린 차 내음과 온도를 좋아했다.
"오늘 너무 바빠서 하마터면 놓칠뻔했다니까. 어때? 예쁘게 잘 만들었지? 이건 내가 봐도 정말 잘 만들었다니까?"
"그렇군. 맛있어 보이는데."
깊은 그림자와는 달리 언제나처럼 유쾌하게 올라간 목소리가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화려한 레이스 무늬의 아이싱 쿠키는 정말 먹기에도 아까울 정도였지만 삿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를 집어 먹었다.
바삭 이며 부서지는 아이싱 부스러기를 툴툴 털며 키들거리는 웃음소리에 그도 희미하나마 즐거움을 베어 물었다.
야식의 덤이긴 하지만 삿치와의 대화는 그의 몇 없는 즐거움이기는 했다.
종종 깊은 밤 잠 못 드는 자신을 위해 찾아오는 삿치의 방문을 기대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유쾌하고 끊임없는 다소 일방적인 대화는 수다를 즐기진 않는 그마저도 말을 보태게 했다.
"이번 쿠키는 에이스가 불 조절을 잘 도와줬어. 왜 저번에 홀랑 태워 먹은 거 기억나? 그게 정말 미안했던 모양이야. 하하핫, 우리 막내 너무 귀여워서 어쩌지? 참. 이번 레시피는 전에 거랑 달리 살짝 어레인지해서 말이야, 네가 좋아할 만한 담백함이 더 돋보인다구~"
"네가 만든 건 뭐든 맛있어."
"그러니까 좀 더 먹어. 더 많이 먹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군."
"참, 내일 아침은 뭐 먹을까? 곧 겨울 섬이라 따뜻한 국물이 있는 게 좋은데, 요 구간은 뱃길은 험해서..."
줄어드는 과자와 식어가는 차, 그것을 앞에 두고도 즐거운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삿치의 모습은 분명 무엇보다 익숙할 터였으나 갑작스레 생경하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달지 않은 경단을 구워 삿치의 특제소스를 바른 꼬치가 소담히 담긴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어떤 날은 달달한 고구마를 구워 에이스에게서 사수했다며 헐레벌떡 달려와 얼른 먹으라 재촉하기도 했었다.
어떤 날은 말린 과일을 조금 챙겨 주며 차가 아닌 술을 기울이기도 했었고,
또 어떤 날은 언젠가 들렀던 섬의 명물 과자 같은 것을 가져오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주먹밥이나 간단한 수프 같은 요깃거리, 견과류나 치즈 같은 술안주, 싱싱한 과일 등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메뉴의 음식을 나누었다.
수많은 시간 속에 그만큼의 삿치가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만큼 삿치의 기억 속에서도 그러리라.
손끝에 감도는 낯선 온기에 슬그머니 손을 감추었다.
익숙지 않은 온기는 매번 마음을 헤집어 곤란했다.
다정한 형제였고, 의지가 되는 동료였고, 실력 있는 요리사인 삿치는 너무도 익숙했지만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깊은 감정을 숨기는 삿치는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었다.
적당히 달콤한 과자와 따뜻하고 짙게 우린 한잔의 차를 나누는 잠깐의 시간이 무엇보다도 달았다.
그의 배려와 유쾌한 웃음과 간혹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기꺼웠다. 그러나 종종 불쑥 치고 올라오는 낯섦이 마음을 술렁이다 넘치게 하곤 하여 곤란했다.
"이제 에이스도 너무 단건 싫대"
"사춘기인가"
"오야지가 술을 줄여서 다행이지?"
"아직 더 줄여야 해"
"마르코 요즘엔 야근도 잘 안 해서 다행이야"
"그렇군"
"하루타도 이제 철이 들어서 장난을 덜 친다?"
"그거 낯설군"
"죠즈는 저번에 다친 거 이제 다 나았어"
"덧나지 않게 조심해야 할 텐데"
"그리고"
"응"
반쯤 깨물어 잇자국이 난 과자가 삿치의 손에서 부스러졌다.
그리고 또,
새로운 모험을 할 거야...
그럴,
거야
그래야,
해...
그렇지?
그런,
거지...?
이조우.
밤은 깊었고 달빛은 어두운 방을 스쳐 바다의 품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태양이 새벽 별의 마중을 받으며 떠올라,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또다시,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
그가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