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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

 By. 야젠

 

  나는 저승사자 중에서도 강림차사다. 나에게 있어서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했다. 여러 죽음을 지켜봤고 셀 수 없이 많은 사연의 무게를 무시하는 법도 배웠다. 그런데 그 녀석은 달랐다.

  죽을 날을 한 달 앞둔 영혼을 지켜보았다. 평소에는 이럴 필요도 없이 죽기 직전에 영혼의 곁에 가서 이름을 세 번 부르고 저승길로 데려간다. 물론 문신(門神)이니 조왕신(竈王神)이니 하는 가택신들의 귀찮은 방해를 제쳐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지난 몇십 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면서 모아둔 휴가를 전부 쓸어 모았다. 그냥 내키는 대로 주워 입은 옷이 아닌 검은 도포를 걸치고 삿갓을 쓴 뒤 한 사람 몫의 적패지(赤牌指)만 옷고름에 달랑 매고서 이승으로 내려왔다. 죽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곁에서 보기 위해.

  지금껏 여자일 때도, 남자일 때도 있었던 만큼 그는 다양한 나이, 여러 외관이곤 했다. 어렴풋이 기억하길, 그중에서도 이번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가장 비슷한 외견이었다. 싸늘하게 분 바람에 날리는 코트 자락을 여미는 손에는 검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무채색에 가까운 분위기의 사내이지만 노란 눈빛이 우연히 이쪽을 향할 때면 괜스레 몸이 움찔했다.

  무술(戊戌)년 정축(丁丑)월 갑인(甲寅)일 술시(戌時) 이각. 향년 26세. 트라팔가 로우.

  녀석에 대해 적힌 적패지의 내용이었다.

 

  녀석의 직업은 이곳 삼차원에서 중요한 사람을 지키는 일인 듯했다. 실력도 그 업계에서 인정받은 모양이라 중요하고도 위험한 일을 도맡을 때도 있었다. 저승에서 볼 때 이승의 지위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서 굳이 그런 놈들을 위해 대신 다쳐줘야 하는 일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녀석은 꿋꿋이, 누구보다도 월등히 그 임무를 수행했다. 몸도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파리해서는 만날 다크서클이나 달고 다니는 주제에 몸은 비할 바 없이 날랬다. 녀석은 기본적으로 혼자 지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전에는 70살까지 살더니, 이번엔 왜 이렇게 일찍 가냐.

 

  그때는 고작 열 살에 일가족이 전부 사망하고 늙어서까지 외롭게 살았다. 그전에는 부모님이 이혼하여 아버지의 탈을 쓴 죄인 새끼한테 학대를 받으며 살았다. 또 그전에는 제법 평탄한 듯하더니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에 슬퍼하고 슬퍼하다가 따라 목숨을 끊었다. 또 그전에는…….

  습관적으로 갓양을 잡아 내렸다. 이런 미련 곰탱이 같은 자식이 내 동기라니, 라고 한탄하던 동료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에 한 대 세게 쥐어박기는 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동기들은 거의 다 하늘로 올라가고 남은 차사는 나와 킬러뿐이었다. 킬러는 가택신의 힘이 세던 그 옛날, 나와 합을 맞추어 영혼을 인도했던 실력 있는 차사다. 요즘 강림차사들은 그렇게 비리비리하다던데. 피식 웃으며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졌다.

  천 년 가까이 일하였지만 하늘에서는 일직차사의 보직을 내리지 않았다. 본디 인간이었던 차사들은 먼저 땅의 일을 하면서 저차원적인 감정들을 모두 그곳에 두고 하늘로 가지만,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코 이승의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킬러라면 몰라도 나의 미련은 그 녀석인 셈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녀석은 이미 망자였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도 더 전, 이름을 세 번 부르자 마른 나뭇가지 같은 눈빛의 사내가 천천히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자신을 데리러 온 나를 보고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다.”

 

  무시하고 데려가려는 내 도포 자락을 붙든 그는 저승차사인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 가족을 몰살시킨 그놈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 알고 싶다.”

  “하! 천기누설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나 아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 그의 손을 털어냈다. 하지만 녀석은 끈질기게도 다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알려주기 전까진 그대를 따라가지 않겠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보통 돈 놈이 아니었다. 알려주는 것 자체도 안 되지만 만에 하나 원귀라도 됐다간 더 골치 아파진다. 저런 사연 가진 놈이 한둘이어야지. 그냥 끌고 가려고 허리춤에 맨 오랏줄을 쥐는 순간 그 녀석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오랏줄은 영혼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기다. 그것을 잡은 손만 만져도 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 텐데, 그는 눈만 움찔할 뿐 손아귀에 더 힘을 주었다.

 

  “부탁이다.”

 

  그의 손을 떼어내고 한숨 섞인 마른세수를 했다. 억지로 데려가면 될 텐데, 저 얼굴이 신경 쓰여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어김이 없고 비정하기로 유명한 차사의 이름이 울겠다. 알려주고 말고, 그 상황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복잡하게 따지다가 이딴 고민을 왜 하고 있나 싶어 입을 열었다.

 

  “그놈, 수명 꽉꽉 채워서 꼬부랑 할배 될 때까지 정정하게 살다가 잠자듯 편안하게 죽어. 이제 만족하냐?”

 

  그 녀석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더디 입을 뗐다.

 

  “놈이 생전에 벌인 짓들을 후회하며 죽을 것 같나.”

  “아니.”

  “그럼 되었다.”

 

  그의 무감정한 얼굴에서 어렴풋이 미소가 떠올랐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차사의 이름은 왜 묻냐, 망자 주제에.”

 

  그의 눈은 올곧게 이쪽을 향했다. 저 눈만 보면 몸이 굳고 생각의 흐름은 끊어졌다. 짜증 나고 귀찮은 감정을 넘어서서 그 녀석이 증오스러웠다. 사람의 영혼은 가볍고도 투명해서 가슴 속 빈자리를 마음대로 드나든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조그맣게 웃음을 흘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승의 문 안쪽에 서 있는 저승차사에게로 걸어갔다.

  그 뒤로 나는 하늘의 심판을 받았다. 망자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부로 입에 담은 탓이었다. 그렇게 천기(天機)를 발설한 죄로 백 년쯤 벌을 받은 후에야 복직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향당신(本鄕堂神)에게 가서 그날 몫의 적패지를 꺼내어 호적과 장적을 맞춰보던 중 익숙한 놈이 보였다. 차사의 눈은 겉으로 드러난 현재의 생만이 아닌 전생, 전전생을 아우르는 영혼의 생을 본다. 그래서 알아버렸다. 자신을 곤란하게 했던 백 년 전 그 사내가 다시 환생하였고, 그 생애의 마무리를 또 내가 짓게 되었음을.

  녀석은 차에 치여 죽었다. 수북이 쌓인 낙엽 위로 날아가 머리에서 검붉은 피를 흥건하게 흘렸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을 거둔 녀석의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닫아주고 뒤를 돌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 끝에 아직 온기가 남은 주검이 닿았다. 이보다 더 잔혹한 죽음도 많이 봐왔을 터인데, 명부를 펼쳐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목에 뭔가가 걸린 듯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트라팔가 로우. 일어나라.”

 

  그의 어깨를 짚자 녀석이 홀린 듯 스르륵 일어났다. 이래저래 크게 다친 적이 많은 그의 몸과 얼굴에는 흉터가 많았다. 하지만 그가 낯선 것은 다른 까닭에서였다. 녀석을 두 번째로 봤을 때, 그는 날 모르는 주제에 내 이름을 물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혼을 쫓기 시작한 세 번째에서도. 네 번째에서도. 여전히 나는 고집스럽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녀석은 전과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저승길에 올랐다. 어째서 녀석은 기억도 못할 나의 이름을 물어보고, 나는 휴가를 전부 반납해가면서까지 놈을 살펴보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욱 그의 환생과 죽음을 기다렸다.

  결국 지난 생에서 녀석에게 이름을 알려주자 그는 바람이 속살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것 때문이었나.

 

  그의 혼을 배웅하던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저승의 문 앞에 선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이 없이 터벅터벅 발을 내디뎠다. 이걸로 이번 생도 끝이다. 다음 생은 언제일지. 50년 뒤일지, 100년 뒤일지는 명부의 시왕들도 보장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음 망자를 찾으려 적패지를 꺼냈다.

 

  “유스타스야.”

 

  뒤에서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녀석의 입에서 불려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아니, 그때에도 확인차 입에 담기만 했을 뿐, 자신을 부르는 말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그의 주변에 ‘유스타스’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빠르게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 사실인지 헤아릴 여력 따위 없었다.

  나는 그에게로 퍼뜩거리는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녀석을 살피는 일은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유스타스 선배님 어디 가셨어요?”

  “아, 그 녀석이라면 이승에 갔다.”

  “왜요? 휴가라고 들었는데.”

  “글쎄. 숨겨둔 꿀단지라도 지켜보러 갔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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