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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By. 분홍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오랜 시간 바다에 버텨왔던 그 기나긴 날들이 무색해지게 만드는 나약함의 시간.

익숙해지고도 남을, 인생의 전부였던 감각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척이며 견디고 있었다.

 

거친 파도는 변함이 없건만.

그 순리에 이끌려 헤엄을 치는 거대한 해군함과.

다급한 부하들의 발걸음 소리가 귀에 틀어박혀 집을 짓고도 남을 것이 분명한 지금, 낯선 이가 되어 마음이 겉돌았다.

심란한 속은 갈피를 잡지 못해 바다를 따라 흔들거렸다.

하늘이 까맣게 구름을 수놓았고 거센 천둥소리가 심장 박동을 따라 울려대었다.

그런 새벽이었다.

 

머리가 아파져 왔다.

 

눈을 감고서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매만졌다.

제 손끝의 떨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주름 가득한 얼굴과 빛이 바랜 머리칼 위로 흔들리는 조명들이 안타까운 모습만 비추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애써 짓밟으며 눌러대었으나 영 소용이 없었다.

막아내지 못한 것들이 기어코 꿰뚫고 올라와 표정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답답한 심정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그 이름을 입 밖으로 토해내었다.

쏟아지는 감정과 함께.

 

“........에이스.”

 

아무렇지 않게 보내리라 다짐을 했건만.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소용이 없는 듯하다.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쓰라렸다.

 

죽음이란 무릇 그런 것이었다.

괜찮다고 웃음을 짓다가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에 문뜩 눈물이 흘러나와 이불을 그러잡으며 몸부림을 치게 만드는 것.

그만큼 질리도록 生과 死를 겪고도 미련하리만큼 멍청해졌다.

언제 죽어도 잘 살았다 싶을 정도로 세월이라는 것을 꾸역꾸역 처먹었거늘.

형태도 알 수 없는 시커먼 뱀 같은 놈이 거프를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의 죽음에는 어쩌지 못하고 뱅뱅 맴도는 것 역시 사람의 운명이겠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찻잔에 금이 갔다.

늙은 노병의 마음처럼 금이 간 그 안에서 짙은 색의 찻물이 소용돌이쳤다.

평온을 바라며 진정하려고 찻물을 들이켰다.

억센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독했다.

목구멍 안이 고통스럽게 쓰디썼다.

연거푸 억지로 입안으로 흘려보내려던 찰나.

자신을 급하게 부르는 부하들의 목소리에 차를 내려놓았다.

 

“거프 중장님.”

“......알고 있다. 이 녀석아.”

“빨리 나오셔야겠습니다.”

 

일어나다 자신도 모르게 잠시 비틀거렸다.

저쪽에서 쏟아져 날아오는 공격들로 인하여 해군함이 망가지는 소리마저 덧없이 들어왔던 부류였다.

주위 사람들이 이 꼴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제 친우들은 어떻게 여길 것인가.

 

죽음을 덮어쓰며 거대한 장송곡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마다 거프는 잔혹한 세상이 싫었다.

 

바다가 보기 싫었다.

그 자리에 있던.

제 아이의 숨소리가 끊김에 환호하던 부하들을 보고 있으니 숨소리가 절로 막혀왔다.

알고 있다.

에이스는 세계에 있어서 악이었고 옳지 못한 생명이었다.

세상이 정한 진리가 그렇다면야 떠나야 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

자신 역시 그렇게 많은 이들을 셀 수 없이 떠나보내지 않았나.

영웅이라 칭송받으며 무수한 영광을 누려 왔으나 그것 역시 죽음과 함께한 부류였다.

 

망토 안으로 새겨진 새까만 목숨값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명치라도 때린 마냥 그 언저리가 아팠다.

이성으로 몇 번이고 옳은 일이었다 소리를 질러대었으나, 영 소용이 없다.

휘청이는 배의 벽을 짚으며 밖으로 나갔다.

갑판으로 들어서니 거친 파도를 따라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과 등에 걸친 코트는 거대하리만큼 그 글씨가 뚜렷했다.

넝마 조각이 된 심정임에도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의에 덧새겨진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이름이 하나.

이제 와 멈추기엔 너무 늦었던 세월이 둘.

지금의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가 없었던 것이 셋.

이것들은 때때로 순서를 뒤바꾸며 거프의 발걸음을 움직였다.

수십 년간.

많은 죽음에도 때론 기계처럼. 무의식적으로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

 

그것이 곧, ‘영웅’의 삶이었다.

 

“편찮으시다면. 들어가 쉬시겠습니까.”

“멍청한 놈. 여기서 내가 뒤로 빠지면 어떻게 되겠냐.”

“어차피 항해는 이미 저희에게 맡기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없는 바다를 네 녀석들도 슬슬 적응해야 하겠지. 이상한 대로만 몰고 가지 마라. 그거면 되었다.”

 

에이스는 부푼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갔다.

세상 모두에게 보여주겠다며 말갛게 웃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계에 그 불꽃처럼 타오르는 꿈을 쏟아놨었겠지.

분명, 이 해군함 앞에 마주한 저 해적들도 그런 세월이 있었을 터.

손에 묵직한 대포알을 그러잡았다.

서로가 가진 입장이란 세상의 시선 아래에 잔혹하기만 했다.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할배. 난 바다로 나가겠어.’

 

자신이 그 꿈을 더 말렸다면.

그 몸 안에 흐르는 피를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그래도 억지로 해군에 욱여넣었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봐라. 에이스.

오늘도 너와 같은 꿈을 가진 놈들이 바닷속에 가라앉고 있다.

이 녀석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말이라는 생각이 치닫는 그 순간에.

거프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폭풍을 뚫고 상대를 맞춘 대포알이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파도를 뚫고 부서져 나가는 놈들의 비명이 시커먼 하늘에 섞여 들어갔다.

거세게 치닫기 시작하는 불꽃은 제 손주 녀석과 많이 닮아 있었다.

꺼지지 않은 불씨였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을 테지.

그러지 못할 테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연기는 비바람과 얽혀 세상을 더 뿌옇게 만들었다.

무표정인 얼굴을 향해 비가 퍼부어졌다.

 

“.....중장님.”

 

부하들의 목소리는 머릿속을 가득 메운 손자의 목소리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하늘을 가르며 커다란 대포알들이 날아간다.

포부를 펼치며 나아갔을 졸리 로저의 깃발이 바닷속으로 처박혔다.

멈추지 않은 폭발음 속에 거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저들이 죽어 나가는 외침에 맞춰서 북이라도 쳐대는 모양이었다.

심박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사무치게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절망과 가까운 소리였다.

 

저들의 죽음조차도 참을 수 없었다.

태어난 이상 반드시 누군가는 죽는 것이 참된 이치이거늘.

그러한 세상을 만든 자들이 이제 와 새삼 다시 원망스러웠다.

몇 년 만이던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빗물이 주름진 눈가에 고여 흘러내린다.

울지 않고 있었으나 분명 울음으로 가득한 흔적이었다.

비를 따라 마음이 흘러내렸다.

 

갑판에 있던 자들은 그의 행동을 말릴 수가 없었다.

노병이 화를 내고 있던 상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스스로가 몸담은 해군이었다.

지금의 행동이 해적들을 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건 다들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고요한 표정과 달리 눈빛이 너무도 처절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젊은 해병과도 비슷했고.

살아남은 것에 원망하며 동료의 이름을 부르는 적장의 애절함과도 닮아 있었다.

사랑을 주었던 이를 떠나보낸 슬픔을 이곳에서 모르는 자는 없었다.

곧 다가올 날들을 떠올리며 품속의 사진들을 그러잡았다.

자신들의 슬픔을 떠올리면서.

 

거프의 행동이 멈춘 건 대포 탄알이 다 떨어진 이후였다.

제법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양손에 꽉 쥐었다.

온몸이 비로 적시어져 차가운 감각이 몸서리쳐지도록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서늘하다고 느껴졌다.

온몸이 젖어 차가워진 온기에 차갑게 죽어간 제 아이가 떠올랐다.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쿵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선실로 들어간 모습에 다들 침묵을 유지했다.

전설이라 불리던 사내의 뒷모습을 보는 시선에 안타까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거프는 에이스의 사후.

 

환청을 지속해서 듣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손주 목소리가 제 탓이라도 하는 듯 찾아와 귓가를 두드려댔다.

그는 차마 그 목소리를 내쫓을 수 없었기에 깊은 속병을 앓기 시작했다.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가 한 번 앓기 시작하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정신이 심해에 가라앉아 빠지는 것처럼.

한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숨만 쉬던 날이 있을 정도였다.

부하들은 이미 모두 눈치를 채고 있는 사실이었다.

티를 낼 수 없을 뿐.

 

갑판의 부하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선실 안으로 들어간 거프가 그제야 벽에 머리를 박았다.

갓 세상에 태어나 울음을 짓던 아기의 모습이 아직도 손에 온기가 남는 듯해 주저앉았다.

상처가 가득한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에이스가 떠나 슬퍼할 놈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할애비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며 원망을 하기엔 자신 역시 에이스를 지켜주지 못했다.

못난 꼴이었다.

 

곁에 있을 때 다정하게나마 더 말이라도 할 걸 싶어졌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가시로 변해 심장에 깊게 박혔다.

까만 눈꺼풀 안으로 그려지는 얼굴이 더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현실.

살아온 세월만큼의 적들을 쳐부수고 강해졌다고 자부했던 자신은 어디로 간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의 공과 무구한 명성도 좌절 앞에선 내세울 것이 못 되었다.

 

처형대에서 울음이 터져 고개를 숙인 너를 안아주며 다독였다면 좀 나았을까.

 

숨이 끊어진 모습을 보며 달려가 품에 안았더라면 괜찮았을까.

 

할아버지가 왔으니 눈을 좀 떠보라고 안아서 흔들었으면 나았을까.

 

갓난아기였던 너에게 좀 더 사랑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털어놓았다면 괜찮았을까.

 

차디차게 몸이 식어가던 때에 내가 많이 사랑했다며 품에 안고 머리칼이라도 쓸어주면 편안했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다 하며 차디찬 바닥에 고개를 숙였다.

나이가 들면 감성적으로 변한다더니만.

자신 역시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숨을 몇 번이고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의 큰 손자는 시건방진 성격이었다.

고작 3살 차이면서 루피 앞에서는 형이라고 엄하게 굴었다.

지도 어설프고 허점투성이 주제에 말이다.

 

그렇기에 자상한 놈이었다.

 

이를 악물며 손을 눈가에 얹었다.

눈을 뜨면 그 새파랗게 어렸던 놈이 여기서 뭘 하며 인상을 쓰고 올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입 밖으로 내어지는 숨이 떨렸다.

흔들리는 해군함 안에서 덩그러니 주저앉아 있는 건 과거 명성을 떨쳤던 해병이 아니었다.

세상이 전설과도 같이 이야기하며 안줏거리로 삼는 그 대단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저 자식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할아버지였다.

노인은 애써 눈물을 홀로 견디고 있었다

그리움은 그렇게 사무쳐왔다.

추억을 흘려보내지도 못한 채 자꾸만 뒤 돌아봤다.

그곳엔 없을 터인데.

 

숨을 얼마나 내뱉고 들이쉬었을까.

밖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에 애써 집중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으면 더 괴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침묵은 어둠이 되어 사람을 삼키려고 들었다.

쇳덩이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내디뎠을 때.

 

그런 거프의 어깨를 투박한 손이 감싸며 잡았다.

언젠가 분명히 마주했던 손길이었다.

 

파도를 따라 흔들리는 배와.

흔들리는 배 안의 조명들.

일렁이는 마음속.

 

괜찮지 못한 모든 상황에 버티고 있는 노병의 귀로 천둥과도 같은 말이 흘러들어왔다.

복잡하게 붓질을 하며 엉망투성이가 되던 머릿속이 일 순 새하얗게 변했다.

그림을 덧칠하기 이전으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여어. 거프.’

 

온몸이 요동쳤다.

몸 안의 기관들이 그 목소리를 익히 알고 있다면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피가 절로 들끓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허공엔 익숙하던 얼굴이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발부터 요동치는 피에 손끝이 저린다.

오랜 세월 속에 목숨을 내걸고 싸워왔던 그 전쟁터에서의 향들이 콧속을 찔러왔다.

아무리 이 바다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맞기는 한 걸까.

눈앞에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이마에서 흘러나온 식은땀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형체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찾아온 머릿속의 지독한 장난질일 수도 있었다.

 

“......로저.”

 

세상을 떠나기 전.

감옥에서 자식을 부탁한다고 말을 하던 순진하고 잔혹했던 그 모습으로.

오랜 시간 목숨을 바치며 싸워왔던 숙적의 얼굴이 눈앞에 놓여있다.

만약 자신이 땅을 딛고 서 있는 이게 진정 현실이라면.

세상을 바꾸어 놓은 그 위력으로 이런 일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숨소리마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견문색의 패기가 날카롭게 세상을 노려보았다.

그 안에 눈앞에 녀석의 삶과 생명은 보이지 않았다.

치닫는 신경 속에 그의 감각이 위험 경보를 울리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라.

에이스의 일처럼.

거프는 그렇게 직감했다.

무엇이 다가올진 모르나 이쪽의 뜻대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창밖으로는 조금씩 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타고난 성미가 그러했다.

호들갑을 떨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지금 이 사태에서 할 수 있는 뭔가가 없었다.

기껏해야 얼른 가버리라고 기도나 하는 거지 뭐.

거프는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노망이라도 들었나 보지.”

 

덤덤한 이쪽의 목소리완 달리 너머의 상대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해가 사라진 밤.

대뜸 전보 벌레로 연락을 하여 내뱉은 말이 로저가 나타났다니.

자다가 일어나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꿈이구나 하고 다시 자빠져 잤을 정도로 터무니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녀석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일을 만드는 건 세월이 흘러도 불가능할 것이다.

감히 그렇게 자신했다.

죽음 너머에 관한 건 명백히 신의 영역이었고, 피조물들이 힘을 모아 머리를 모아 안간힘을 써도 가능한 수순은 되지 못했다.

무릇 세상에 정해진 진리란 것이 그러했다.

이제 와 녀석이 되살아 난 건 아닐 테고.

황당함을 감추며 물어보니까 들려오는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귀신이 보인단다.

맨 처음에는 이 오랜 친우가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각에 술이라도 처마신 걸까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듯했다.

 

[로저가 죽은 지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귀신은 무슨 귀신이야.]

“내가 그걸 모르나. 그냥 내 눈에 보이는 걸 어떻게 하라고.”

 

거프는 구석에 앉아 마치 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는 영혼을 바라보았다.

아니, 영혼이긴 한 걸까.

갑자기 어디가 골병이 들었나 한들 수긍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상대가 달랐다.

자신은 몽키 D. 거프였다.

살면서 아픔 따위 개나 줘버리라는 마인드로 살지 않았던가.

 

혹 에이스의 죽음 이후 지속적인 환청이 들려왔던 것이 병이 더 깊어졌을 수도 있었다.

환영은 아닐까 싶어 기본적인 건강 검사를 해봤으나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환청은 저 자신의 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니 넘어가고.

 

저 귀신 놈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신기루에 불과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이 내거는 착시현상이면 좀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그냥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사실이었다.

삶의 끝자락에 선 노병의 본능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피부로 느끼지 못해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왔던 장병으로서.

현실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장난은 아니라는 걸 눈치를 챈 건지 건너편의 센고쿠는 말이 없었다.

 

“술이나 처마시고 있다만. 제 일 아니라는 듯 구는 게 영 밥맛이야.”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귀를 파며 대답을 했다.

그제야 로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어느새 웃음을 지은 채로.

저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일렁거렸다.

아직 자신들의 세계였던 그날의 날들이 파도를 치며 조금씩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강자들과 목숨을 걸고 피를 튀기며 싸웠던 그 날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 같다.

화약 냄새.

흝 냄새.

피 냄새와 땀 냄새.

잊고 있을 거라 여겼던 그 날의 날들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피가 들끓는 걸 보면 말이다.

젊은 놈들도 아니고 이거야 원.

 

‘그 녀석도 많이 늙었겠군.’

“아아. 많이 늙었지. 스트레스를 하도 받아서 원수직 때려치우자마자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고.”

‘세상이 꽤나 재밌게 돌아갔나 보군.’

“죽기 전에 이상한 말 싸질러 놓고 간 누구 씨 때문에 말이지.”

[잠깐. 지금 누구와 대화를 하는 건가, 거프.]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통화하고 있었지 참, 하며 전보 벌레를 보았다.

로저에게 시선을 빼앗기면 다른 일엔 통 집중을 할 수 없게 된다.

과거에 머무른 채 흙 속에 파묻혀 송장이 된 녀석들처럼 얽매여버렸다.

저놈과 얽히는 건 수십 년의 지난 나날들로 충분할 줄 알았건만.

로저 쪽으로 눈을 흘기다가 전보 벌레를 바라보았다.

센고쿠 역시 별다른 방법을 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귀찮음이 확 몰려왔다.

대화를 대충 마치기로 했다.

 

“어쨌든 해군 본부에 가면 검사 좀 받게 미리 부탁하지. 내 머리에 이상이 간 걸 수도 있으니까. 참, 자네가 숨겨놓은 전병은 내가 좀 가져왔어.”

[잠깐, 거프. 잊은 건 아니겠지. 내일은-]

 

상대의 말은 듣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뭐라고 다급하게 되묻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한데.

자신이 알 바는 아니다.

가만히 앉아있던 거프가 제법 복잡한 듯한 상황에 한숨을 내뱉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몇 번을 봐도 영 적응이 안 되는 얼굴을 향해 시선을 흘리었다.

왜 죽어서도 귀찮게 만드는 것일까.

로저놈과 함께라면 믿지 못할 어떠한 일들이 또 일어날지도 몰랐다.

죽어서라도 그 이름값은 실로 대단하기만 했다.

왠지 그럴 것만 같은 감이 치밀어 꺼림칙해졌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저놈과 관련이 되어 얽힌 일 중 좋은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있어도 없었다.

그러니 없을 것이다.

 

“난 죽은 해적 놈 따위 성불시켜줄 사람을 알아봐 줄 정도로 자상하지 않다고. 로저.”

‘의외군. 내가 아는 넌 누구보다 자상한 남자였을 텐데.’

“퍽이나.”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선실 안 소파에 털썩 앉는다.

편하게 등을 기대며 테이블에 놓인 전병 과자를 와그작 먹는다.

전 원수직이었던 양반이 소중하게 보관을 해놓았기에.

과자의 상태는 바삭하고 품질이 좋았다.

배가 고파 그의 방을 기웃거리다가 찬장에서 발견한 것들을 몰래 꿍쳐놓길 잘했다.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다가 문뜩 치미는 의아함에 입을 열었다.

 

“죽었는데 술은 어떻게 마시는 거지.”

‘나야 모르지. 마실 수 있어서 마신다.’

“거참, 신기한 일이네.”

 

잠시 간 거프의 선실에는 담백한 과자를 깨물어 먹는 소리만 울리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야 해결책이 떠오를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귀신을 떠나보낼 수 있는 해결책이 있던가.

귀신인지 환영인지 이쯤 되면 내가 알게 뭐람.

환청만으로도 이쪽은 꽤 성가시다만.

지금 이 꼴을 로저 해적단 놈들도 모를 것이 분명한 사태에 대해 끄응 소리가 절로 나왔다.

헛된 잡생각으로 과자를 쉴 새 없이 먹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미간이 좁혀졌다.

궁금하긴 한 건지 망설임 없이 물어온다.

 

“잠깐. 그럼 너 화장실은. 안 가나?”

 

그 말이 들리자마자 호쾌한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기껏 죽은 자가 되어 나타난 오랜 적에게 한다는 소리가 겨우 저런 것인가.

그것도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꼴 하고는.

젊었을 적 서로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그때의 순수함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로저는 제법 즐거워졌다.

왜 웃냐는 듯 심드렁한 표정엔 주름이 가득했다.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깊게 파인 적장의 눈가는 이제 빛이 바랜 듯했다.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그 빛남을 찾기란 어려웠다.

역경과 처절함 역시 저 안으로 새겨졌으리라.

술 생각이 절로 났다.

자신이 없던 세상은 보란 듯이 변화를 이루며 나아갔다.

당연한 이치였다.

분명 처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들리었던 사람들의 환호성은 직도 생생했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로저는 그래서 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세상은 골 D.로저를 빼놓고서 설명을 할 수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겠지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난 옛날이야기 따위 고리타분하고 발목만 잡을 책갈피에 불과했다.

 

‘나쁘지 않아.’

 

당사자는 무관심한 건지 선을 긋는 건지.

어차피 죽은 입장이니 세상에 관심을 가져봤자 무엇에 쓰겠냐마는.

로저는 이곳이 어디냐는 질문만 던졌을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어떠한 기를 내뱉지도 않았다.

그런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고. 못내 씁쓸하기도 한 거프였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누구에게도 축복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손자.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린 듯 새까맣게 변했다.

골이 울리는 두통에 거프가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피를 울리지 마. 할배]

 

이제는, 환청인지 아니면 이 늙은 몸뚱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린 분명.

제 가슴속에서부터 피어올라 심장을 조여왔다.

에이스가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겪고 갔던 그때처럼.

 

“....이봐, 로저.”

‘왜 그러지.’

“나타날 것이었으면 다른 놈들이 더 낫지 않나. 레일리 녀석이나 로저 해적단 놈들이나. 그쪽으로 가지 왜 내게 모습을 보인 거지.”

‘나도 모르네.’

“너도 모른다니.”

‘눈을 뜨니 바다 위였고.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렸거든.’

“목소리?”

‘말했잖나. 나도 모른다고.’

 

여전히 생각과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직설적이고 흔들림이 없는 성격이었으나 때론, 저 생각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골 D. 로저라는 남자에 대하여 이해를 해야 할 때마다 난관에 부딪혔었다.

굳이 따지자면 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야만 하는 사람이 된 심정과 비슷했다.

자신은 머리가 그다지 좋지 못해 본능이 이끄는 곳으로 종종 문제를 이탈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게 정답이 되고는 했었다.

 

매섭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검을 겨누고 치열하게 싸우는 전투 속에서도 로저는 종종 다른 것을 떠올렸다.

그 너머의 세상 혹은 맞부딪히는 검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의 제목을 써 내려갔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손에 쥔 채 몇 번이고 바다를 매료시켰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거프는 심적으로 이해를 했다.

그런가.

너도 목소리가 들리는 건가.

그게 어떤 목소리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처럼 속 어딘가가 구멍이 뚫려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울부짖음의 일부이겠거니.

 

“더 묻진 않을 모양이군.”

‘무엇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을 거라 생각을 했는데.”

‘묻는다고 대답을 해줄 건가. 해적인 내게.’

“못할 건 뭐가 있나. 어차피 죽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자신에게만 보이는 유령 따위 겁을 낼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로저로 인해 탄생이 된 이 바다에서 귀신 따위에 겁을 먹고 물러설 놈들은 없다.

애초에 해적이라고 대답을 안 해줄 건 또 뭔가.

저쪽은.

 

“그 해적 놈이 해군에게 아이를 맡겼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만.”

 

맞다.

그랬다.

오래 알고 지내온 인연으로 인하여 죽기 전 얼굴이라도 보러 찾아갔건만, 혈육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저쪽이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도, 루피 녀석이 고통을 받은 것도.

 

에이스가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맹렬한 만큼 짧게 피어나, 새까맣게 타들어 간 이야기를 엮은 그 책의 이름은 분명 –포트거스. D. 에이스- 일지언정.

잿더미가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종이 너머로 덧씌워진 끝엔 자신의 필체로 가득했다.

로저는 예의 그 시선으로 오랜 숙적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거프가 에이스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덤덤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원망스러운가.’

 

모든 걸 다 꿰뚫는 눈동자가 변함도 없이 사람의 가슴을 후비어팠다.

누구보다 자식이 살아가길 바랐던 할아버지는 제 손주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굳이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야만 한다면 그건 저 남자를 향한 차디찬 화살이었으리라.

거프는 이제 와 새삼 많은 것들에 대하여 미움을 느끼고 있었다.

숙적만 보아도 그러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통받게 한 대가를 저승에선 치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렇게 평온한 모습으로 저런 말을 날리니까.

적어도 고통의 몫에는 손주 놈이 날린 화살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럼 에이스 녀석이 조금은 후련했을 테지.

 

“그렇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죽은 놈을 원망해봐야.”

 

죽은 녀석은 살아 돌아오지 않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당연한 말이 가시가 돋아났다.

억지로 삼켜내었더니 독하게 내장으로 내려가 상처를 내는 모양이었다.

속이 안 좋아졌다.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볼 수 없다.

마음 어딘가에서 부정하던 것들을 제 입으로 내뱉으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덧그려져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쏟아내고 싶은 거센 구역질이 치밀었다.

 

전장에서의 몽키 D. 거프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화장실로 가 변기에 고개를 숙였다.

모든 걸 게워내고 싶어도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없었다.

속에서 있는 대로 얽혀 그 무게감이 짓눌렸다.

 

[할배. 루피 녀석이 말이야.]

 

귓속을 갑작스레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떠는 손으로 입을 헹구고 거울을 보니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군.’

“갈 때가 되었겠지.”

‘아직 살아있는 것을 부정하는 건가.’

“시끄럽긴.”

‘거프.’

 

무심하게 던지는 거프의 눈빛에 로저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곳이 해군함이 아니었고 자신이 이렇게 늙지만 않았다면 과거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변함없는 표정이었다.

먼저 세상이 떠난 이의 시간은 그대로 멈춘 채 바뀌지 않았다.

이런 진리나 이치를 누가 정한 것일까.

애석하게도 신이라는 작자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적이 없던 인물일 것이다.

 

‘죄악의 핏줄이라고 해도. 어차피 넌 사랑을 줬을 테니.’

 

무덤덤한 말을 듣고 확신을 할 수 있었다.

그 처형대에서 자신과 에이스의 꼴을 보며 저승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눈에 훤하였다.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언젠간 자신의 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저 자식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게.

그게 몹시 화가 치밀었다.

 

골 D. 로저는 부모로서 밑바닥을 찍고 얼굴을 내밀었다.

 

열이 치솟는 감각에 물을 틀어 수돗물에 머리를 박았다.

세면대에 가득히 찬 물 속에 얼굴을 파묻으니 누군가 쇠사슬로 몸을 묶는 느낌이 치밀었다.

지금의 스스로와 싸우고 있는 건 사실, 로저도 에이스도 아닌 죄악감이라는 형체도 알 수 없는 놈일까.

고개를 드니 적시어진 얼굴과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 녀석은 어찌 저 말을 그리 쉽게 뱉어낼 수 있나.

고통받으며 삶을 살았던 그 녀석을 마주한다면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을 놈이.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비단 차갑게 적시어진 물 때문은 아니리라.

 

“에이스는 널 사랑한 적이 없다.”

 

로저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진 중요치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 패기를 있는 대로 둘러 저 얼굴을 손으로 쳐부수고 싶었다.

 

“에이스는 흰 수염 녀석을 따랐고. 그 녀석을 아버지라 여겼다. 핏줄에 상관없이 받아주고 사랑을 준 놈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뉴게이트 놈은 그런 점에서 이상하리만치 물렀으니까.”

 

숨소리도 머리를 따라 차가워짐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가라앉아 차분해지는 감각에 거프가 거울 속의 로저를 보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군.”

‘이 바다에 오른 이상 각오를 하지 않으면 죽는 거다. 그걸 내 아들이라고는 해도 피할 수가 없던 거지.’

 

거프가 주먹을 쥐고 세면대에 있는 거울을 내리쳤다.

거울이 순식간에 파열음을 내어 깨졌고 바닥으로 조각이 날아갔다.

벽에 금이 갔다.

깨진 거울의 조각들이 거프의 얼굴을 사방에서 비추었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두 눈은 적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응어리진 마음이 보였다.

처절한 목소리가 로저를 향했다.

 

“넌 에이스 곁에 남았어야만 했다.”

‘해적왕으로까지 불리었던 내가 말인가. 세상은 나의 죽음을 바랐을 텐데.’

“해적인 넌 죽었어야 했다만.”

 

로저에게 손을 뻗었다.

허나 닿지 못하고 그대로 공중을 지나쳤다.

이쯤 되면 정말 환영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지독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지.

참지 못하고 말을 토해낸 것은 영웅이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지켜내었고.

제 가족의 죽음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모인 넌 끝까지 곁에 남았어야 했단 말이다. 로저.”

‘자네가 사랑을 주지 않았나.’

“난.”

 

그 한 마디에 거프의 숨이 턱 막히었다.

 

난.

 

어린 시절,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에게 살아봐야 안다는 그 한 마디만 내뱉었다.

로저로 인해 끝없이 나락으로 빠지는 놈을 알면서 한 발자국 멀어져서 바라보기만 했다.

삶의 끝에서도.

그렇기에 저승에서 이 녀석이 고통을 받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다.

에이스가 괴로워했던 만큼은.

그만큼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로저를 지나쳐 밖으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숨을 들이쉬고 주먹을 있는 대로 쥐었다.

상처로 가득한 다부진 주먹은 이미 새까만 패기로 감싸있었다.

타들어 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색이었다.

그의 마음처럼.

 

“너로 인해 에이스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로저.”

 

죽었으면 곱게 죽을 것이지.

그곳에서 에이스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 것이지.

 

“그놈은 내 손자였단 말이다.”

 

밝게 웃는 모습이 스치고 지나가 이를 악물었다.

피는 같지 않아도 분명한 내 새끼였다.

에이스가 태어났을 때의 아기 울음소리를 떠올라져 눈이 시렸다.

어린 에이스의 울음소리가 죽음에 대해 되새김질할수록 선명해졌다.

 

내가 살리지 못한.

 

내 손자.

 

로저를 향하던 시선이 이내 바닥으로 옮겨졌다.

거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다음 생에는 내 손자로 태어나야 한다. 그놈은.”

 

그러면 품에 한없이 안아서 잠이 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장가라도 신명 나게 불러줄 테니.

이런 세상이 아니라 평화로운 그 너머에서.

누구보다 내가 사랑을 줄 테니까.

 

내가 지킬 테니까.

해주지 못한 것들을 대갚음할 것이니.

허나, 자신이 그래도 되는 것일까.

 

“어차피 부모 자격도 없는 놈들이 서서 뭘 하는 거람.”

 

얼굴에 지어진 건 슬픔으로 가득한 비웃음이었다.

그렇게 애원을 한다고 한들 저쪽은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었고.

이쪽은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과분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프의 눈물이 애달팠다.

 

그 전쟁에서 웃으며 죽어간 녀석이 눈에 선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나날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선잠에 깬 추운 새벽에.

 

그래, 에이스 너도 잠을 못 이루고 있나 보군.

 

혼자 읊조리며 창 너머를 보면서 한참을 서 있던 나날들이 열 손가락을 접고도 부족했다.

거프는 에이스가 죽고도 떠나보낼 수 없었다.

 

죽었다는 기사가 온 세상에 나 해군의 승리를 기뻐하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없었다.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술을 한 병 들고서 에이스가 죽었던 그 장소에 가 주저앉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독한 삼킴에 표정을 구기어도 울 순 없었다.

 

울지 못했다.

 

“......제기랄.”

 

읊조리며 흘러나오는 눈물에 어깨가 잘게 떨렸다.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벽을 짚었다.

 

[뭐야. 할배. 우는 거야?]

“시끄럽다. 이 녀석아.”

[......뭐 때문에 우는 건데.]

 

귓속을 채운 목소리마저 걱정을 띄우고 있어 그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차디차게 죽어간 놈이 걱정은 무슨 걱정이냐.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데 원망은 하지도 못할망정.

왜 구해주지 않았냐고 화를 내기는커녕 동생 지키겠다고 떠난 놈이 누굴 걱정하는 거냐. 이놈아.

 

“......넌 행복했어야 했단 말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행복해지리라 의심치 않았다.

바다는 넓으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웃기를 바랐다.

되먹지 못할 해적 놈이 되길 그렇게 바란다면 끝까지 살아서 제 아비보다 잘 되기를 원했다.

그럼 자신은 신문을 읽으며 마음 편히 먼저 가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의 곁으로 갔을 것이었다.

 

시리다 못해 아파오는 눈가에 거프는 눈을 감았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표정 위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눈이 부시게 빛났을 검은 색의 머리칼이 전부 희게 변하여진 그 세월 모두에.

그는 제법 지쳤다.

 

무엇에 감도 되어 삶을 사는가.

스스로라면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그 나락은, 절망이라는 과실이 달콤하게 퍼져 거프가 헤어나올 수 없었다.

살아있는 자의 몫은 비단 털고 일어나야 함을 모르지 않지만.

쌓이고 쌓인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그의 덤덤함을 갉아 먹어 가슴의 구멍을 뚫어놓고.

이제는 말라비틀어져 새살이 돋아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까맣게 밀려들어 가는 눈꺼풀 속 암흑에.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표정을 있는 대로 구긴 채 창 너머를 보았다.

밤이 내려앉아 암흑이 내려앉은 시각.

바다도 하늘도 새까만 시간에 삼켜져 밝았던 모습을 감추었다.

넓디넓은 바다에 두둥실 떠 있는 해군함이 하나.

마치 영락없이 제 꼬락서니와 빼닮은 모양새였다.

 

어디로 가든.

어느 쪽으로 흘러가든.

그냥 가는 대로, 이끄는 대로.

 

창 너머로 짙은 안개가 눈에 비추어졌다.

로저는 우두커니 서서 웃음을 지으며 거프를 보고 있었다.

나이는 노병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저건 나로부터 튀어나온 내 그림자와 같은 부류였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곤함이 그를 집어삼켰다.

 

자자.

잠이나 자야겠다.

 

탁, 소리를 내며 거프가 무거운 손을 들어 선실의 불을 껐다.

눈을 감은 눈꺼풀 속마저 암흑으로 가득 차서 어디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은 바다 위에.

힘겹게 삶을 지탱하는 노병이 하나.

방에서 어둠과 얽혀 웃는 죽은 이의 그림자가, 하나.

 

암흑이 내려앉은 곳에서 까만 로저의 눈동자가 빛났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 장난기도 스며들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녀석은 올 테니까.

 

 

 

 

 

 

 

 

 

 

 

 

눈을 떠도 변한 게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피곤함에 짓눌려 온몸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으로 눈을 떴더니 역시나.

저 꼬락서니를 눈에 담는 것도 벌써 지긋지긋했다.

어제의 변함 없는 그 모습으로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있는 죽은 인영이 거슬렸다.

아니.

저건 귀신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상은 환상이 되어 사람을 집어삼킨다고들 했으나 그곳엔 자비란 없었다.

사흘째였다.

이쯤 되면 신의 농간과 가깝게 느껴졌다.

 

동시에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심적으로 더는 못해 먹겠으니 더는 해군 본부에 그만 얼쩡거리고 고향으로 가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세상이 쉽게 놓아주진 않겠지만.

제가 그리 하겠다는데 막는 녀석이 있다면 쥐어박을 것이다.

자신은 쉬어도 되었다.

그럴 자격이 있다.

오랜 시간을 바쳐왔으니 그 모든 것에서 헤어나올 때도 되었다.

잔잔한 바다를 보며 술이나 마시고 떠들면 이 병세도 금방 나으리라.

 

그리 소망하며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고요함이 가득한 파도와 사방에 가득 낀 안개가 들어왔다.

창문을 열었음에도 파도 소리 하나일지 않은 고요함이 꺼림칙했다.

쓸데없이 조용하다 보면 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영, 찝찝한 기분이 치밀었다.

 

“날씨도 이 모양이군.”

 

선선한 공기가 거프의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짙게 내려앉은 흰색의 바다가 항해 하는 데에도 지장을 줄 것 같아 미간이 좁혀졌다.

 

이 며칠간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항해 명령을 내리진 않았었다.

어차피 부하 놈들도 다들 장병이었다.

자신이 없는 세계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것에 슬슬 적응해야 할 터.

맡겨보자는 심정으로 떠넘겼더니 결국은 이 꼴인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로 배를 이동시키는 건지.

신세계라고는 하나 이 근방은 날씨가 좋기로 유명한 곳 아니었나.

 

어쩐지 어제 발이 푹 꺼져서 빨려 들어가는 모래 속에 파묻혔던 그 기분들은, 날씨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이곳이 어딘지 확인부터 해야 할 생각으로 지도와 나침반을 찾아 꺼내왔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힘듦을 떠받치고 있었기에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하는 녀석들이 달갑게 느껴지진 못했다.

이참에 농땡이를 피우는 놈들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면 딱일 것이다.

 

‘거프.’

 

지도를 펼치자 예의 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뜩이나 깊게 팬 이마에 최근 들어 주름이 더 늘어난 듯했다.

벌써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들을 때마다 손이 멈칫해지는 건 별수 없는 본능과 비슷했다.

처음엔 놀랐었고. 어제는 구슬펐으며.

오늘은 피곤하기만 했다.

 

만약 이 모든 게 머릿속에서 내보이는 장난에 불과하다면.

제 심정이 얼마나 찢겨 내동댕이쳐졌기에 저런 환각을 내보인단 말이던가.

새삼 자신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이 그제야 인지되었다.

혹 스스로가 과거의 날들을 그리워하는 걸까.

저 면상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든 적이 없었건만.

 

‘거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나.’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처럼 굴 것이다.

겉이 그을려 바삭해진 토스트를 입에 털어 넣어놓고서 와그작 씹었다.

그걸로는 부족해서 전병을 찾는 손길에 로저가 입을 연다.

 

‘그럼 이곳이 어디인진 아나.’

 

이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해군함이다 멍청아.

죽었더니 눈도 삐었구만.

이라고 습관적으로 대답을 할 뻔하여 속으로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제 성격도 제 성격이었다.

 

반응해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저것에 얽히면 더 얽힐수록 제 몸을 칭칭 감아다 시퍼런 바다에 푹 빠뜨릴 것이었다.

불과 어제 느꼈던 그 감정들은 지금도 가슴 언저리에 맴돌아 거세게 찔러대고 있었다.

 

어젯밤을 떠올리니 숨이 절로 막히었다.

저 자신이 삶을 살면서 그렇게 망가져 버린 순간이 있던가 되짚어 보아도 어제만 한 날이 없었다.

에이스도 에이스지만 그 아비마저 자신에게 다가와 괴롭히는 꼴이 어이없기도 했다.

저 핏줄에 전생에 뭐가 단단히 박혀있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치고받으며 싸우는 편이 더 나았다.

전투로 인해 입은 상처는 더디어도 금방 나았지만.

사람으로 인해 입은 응어리는 시간이 흘러도 영 치료가 될 기미가 없었다.

이 나이를 먹었으니 더 응어리질 공간도 없어서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드는 꼴이었다.

 

‘이곳은 흡사. 죽은 배들의 안식처라고도 불리었지. 요즘에도 이렇게 부르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세계에선 유일했으니 말이다만.’

 

그 말에 거프의 손짓이 다시 한번 멈칫했다.

에이스를 떠올리던 머릿속도 일순간 정지.

목소리의 주인공 때문이 아닌 그 내용으로 인하여 사고가 멈춰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로저를 바라보았다.

관심조차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설마, 하는 기억들이 강제로 끄집어 올려졌다.

 

자신은 저 이야기를 알고 있다.

신세계에서 죽은 배들의 안식처라고도 불리었던 장소를.

 

그 옛날 풋내기 때 뱃사람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해역을 지나갔던 장면이 스쳤다.

파도가 무척이나 잔잔하고 안개가 짙게 끼는 바다.

신세계 전역에 퍼졌던 파도들이 고향처럼 돌아오는 곳이었다.

과거의 찬란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온갖 배들이 모여들어 워낙 방대했던 탓에.

불태우고 불태워도 끝이 없다던 그 심연이 기억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

 

‘실제로 죽은 이들이 구천에 많이 떠도는 걸 본 사람들 역시 많아.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었었지.’

“.......삼도천.”

‘알고 있었나.’

 

입 밖으로 저 단어를 내뱉자마자 온몸을 간지럽히듯 소름이 돋아났다.

 

빛이 바래진 세월 속에 분명히 있었던 그 일은 어설프게 들리는 노랫소리처럼 흐릿했다.

어둠 속에서 물건이 잘 보이지 않아 책상을 더듬는 것처럼 천천히.

 

그저 확실한 건.

자신이 아직 장병이 되기 이 전의 시간이었다는 것.

갑판에 나와 청소를 하며 하품을 하던 거프의 눈에 오래된 해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들어왔었다.

그 해군복은 오래된 것이었고 할 말이 있는 듯 자신을 향해 다가오다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헛것을 봤다고 말을 한 자신에게 츠루가 그랬었던 것 같다.

 

“본 이상 그건 헛것이 될 수 없다고 했나.”

 

분명 그리 이야기를 했었다.

하물며 그날 비슷한 걸 봤다고 말 한 이들이 한둘도 아니었지.

그 이후로도 종종 해류에 이끌려 이 해역을 지나친 녀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비슷한 현상은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그리웠던 과거와 마주했고.

또 다른 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도 자신이 직접 들었었다.

 

왜 그 과거를 지금에서야 떠올렸을까.

안개에 파묻힌 해군함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바다 위에 떠 있다.

책상 위로 꺼내어 둔 나침반의 바늘이 요동쳤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신없이 사방을 가리켰다.

서늘한 세상에 갇혀 배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살면서 그 모든 과학 기술을 동원해도 세계란 역시 무서운 법이었다.

일어나지 못할 일 앞에 생명이란 때로 무기력했다.

 

“그랬군. 그 해역에 들어온 것이었나.”

 

서늘한 바람이 볼을 건드리는 감각에 거프가 눈을 감았다.

상태가 좋지 않아도 자신이 배를 이끌었어야 했다.

온갖 이야기가 다 들려오는 소문이 무성한 그곳을 수십 년 만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아침부터 불길했던 기운은 바로 이 때문이었군.

제 촉이 사라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이거야 원.

 

잠시간 침묵하던 거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로저.”

‘뭐냐.’

“그러고 보니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냐 묻지 않았나.”

‘10월 31일이다.’

 

악운은 연달아 악운을 끌어들이는 법.

날짜를 듣자마자 한숨 아닌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쯤 되면 우연의 일치라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엔 뒤가 너무 구렸다.

누군가의 계획이라면 질이 나빴고,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성질이 더러운 놈이 분명했다.

 

“그 날짜 때문에 어제 전보 벌레로 센고쿠 녀석이 내일 어쩌고 말을 했었던 모양이군. 끊어버려서 다 듣지는 못했지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10월 31일을 모르는 자들은 해병 중에 없었다.

 

신세계를 포함한 많은 섬에서 죽은 이들이 되살아 온다고 축제를 벌이는 그날.

해군 본부 역시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내었다.

다만 엄숙하고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그곳은, 웃음소리 대신 울음소리가 들어앉는 날로 유명했다.

 

죽은 동료들의 사진을 가슴에 묻는 추모의 하루.

 

사랑했던 이들에게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며 그리워하는 공식적인 행사였다.

슬픔은 가슴에 박혀 뿌리를 내리고 몸을 숙주로 삼아 자라가기 마련인지라.

떠나간 이들의 사진을 끌어안고 흐느끼던 얼굴들을 세어보라고 한다면, 비단 제 얼굴에 가득한 주름의 수보다 많을 게 분명했다.

이날만 되면 과거에 매혹되어 동료들이 주저앉곤 했다.

그런 꼴들은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거프가 일 년 중 가장 싫어하는 하루였다.

다정한 영웅에게 있어 동료들의 눈물은 가슴에 박혀 떼어지지 않은 가시와 다름없었다.

 

“그럼 네 놈은 정말 죽어서 온 귀신이라는 소리군. 로저.”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모른다.’

“귀신이라고 해라. 귀찮게시리.”

 

정신 사나운 말장난 꼬락서니하고는.

불명확한 대답은 쓸모가 없을 뿐이었다.

 

저건 귀신이다.

삼도천에 10월 31일.

이 이상 설명은 불가했다.

애초에 설명이 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현실인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심란해지는 기분에 거프가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 해역에 대해 알아차린 그 시점에서부터 목구멍이 근질거리는 것이 영 좋지 못했다.

많은 고비를 넘어왔던 자로서 무시 못 할 감각은 주인에게 위험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드나든 경험이 있던 거프 역시 제법 그러한 것들을 신뢰하고 있다.

 

어제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바빴고 로저에게 휩쓸려 가라앉았다만.

오늘은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상황이 일어나게 된 가능성을 떠올리며 눈을 움직였다.

 

그런 거프를 지켜보던 해적왕이 웃음을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지.’

“귀신 놈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 중이다, 이놈아. 또 모른다는 말을 지껄일 거면 그땐 바다에 던져버릴 거다.”

‘어차피 잡지 못할 것 아닌가.’

“사람은 끈기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법이지. 애초에 네 녀석만은 내가 바다에 빠뜨려야 속이 시원할 텐데.”

 

참, 변하지도 않은 글러 먹은 성격에 로저의 얼굴 위로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저런 생각이 강함을 이끈 게 분명했다.

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때로 그것들은 무모했고 잔혹했다.

그를 가시로 가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렸으나 기어코 그 위를 기어 올라온 것이 제 숙적이었다.

비록 정의라는 코트 아래에 적수가 되어 셀 수 없이 목숨을 노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싸워나가는 해적과 같은 면모.

해군만 아니었으면 제 동료로 삼았을 것이다.

바다를 나가 술을 마시며 모험을 떠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거프와 함께였어도 퍽 즐거웠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어깨에 걸친 그 정의마저 허울만 남아 펄럭임에도.

수십 년간 그곳에 머물렀으면서 무엇 때문에 남아있는가.

떠돌지 못하고 맴도는 마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거프.

 

말없이 바라보던 로저가 입을 열었다.

 

‘포트거스 D. 에이스가 보고 싶은 건가.’

 

그 말에 거프의 눈동자가 어제처럼 차분해졌다.

로저의 입에서 저 이름이 나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 이름을 뱉는 거지.”

‘그저 궁금할 뿐이다만.’

 

말 그대로 로저의 눈빛에 잔잔한 파도가 일렀다.

다른 의미 없이 말 그대로 하나의 궁금증만 담고 있는 눈빛에 거프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 녀석이 어떠한 생각으로 그 이름을 자신에게 꺼내어 내미는지 알 수는 없다만.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이쪽에서 알아차리긴 힘들게 분명하겠지.

옛날 같았으면 어디가 묶어놓고 신명 나게 두드려 팼을 터였다.

물론 당하고 있을 녀석이 아니겠지만 막을수록 더 때리면 그만이었다.

그러지 못하니 영 갑갑했다.

우선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한숨을 내뱉고서는 삐딱하게 앉아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서늘했던 눈빛 위로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보고 싶다라.”

 

정말 지긋지긋한 단어였다.

떠나간 이들의 수를 더하고 곱 세어도 그리워했던 나날을 따라오긴 역부족일 것이다.

애틋함과 애절함을 모두 품은 감정이 입안에 감돌아 목이 탔다.

세상을 먼저 떠나서 불효를 저지른 손자를 어디가 예쁘다고 보고 싶겠냐마는.

눈에 아른거렸다.

만나서 할 말도 없었으며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냥 얼굴 한 번만 봤으면 싶었다.

구차하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짐짓 심장이 울려대었다.

에이스가 세상을 떠난 그 순간부터 줄곧 그래왔다.

 

“부모라는 게 어쩔 수가 없는 법이지.”

 

로저 자신이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많은 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거프는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던졌다.

거침없던 표정과 무서울 것 없던 젊음의 패기는 희미해져 보이지도 않은 듯하다.

그의 얼굴에 덧씌워지는 그리움은 역시 생각보다 짙었다.

불과 사흘이었으나, 상태가 좋지 않음은 그 누구더라도 눈치를 챌 정도였으니.

거대한 거목은 거센 바람에 제법 휘청여 뿌리가 뽑힐 것같이 아슬한 모습이었다.

그 바람을 일으킨 것이 제 핏줄이었음을 로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리 앓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는 스스로가 얼마나 쓸모없는 놈인지를 안다.

품에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 불행한 운명만 쥐여 준 부모와 거프는 달랐다.

앓고 있는 속병은 그 병세가 깊어 쉬이 낫지 않을 듯해 보였다.

무수했던 과거의 빛남이 시들어 갈 정도의 모습을 보일 만큼 말이다.

부모는 어쩔 수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거프를 향해 로저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어디를 가는 거지.’

 

걸음을 멈추고 고개가 창밖을 향했다.

여전히 짙은 안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야를 막아놓았다.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적어도 지금은.

거프는 생각 외로 그 질문에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10월 31일만 되면 부엌으로 가 생전에 동료들이 좋아하던 음식이라고 준비를 하는 녀석들이 싫었다.

미련하고 애달파서 가슴이 쓰려 보고 있자니 웃기도 힘들었었다.

빠짐없이 매년 챙기던 제 친우들을 보며 고개를 돌렸었다.

슬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다.

보내야 할 때는 보내자.

남아있는 자들은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를 인생을 살면서 나아간다.

먼저 떠나간 이들을 위해서라도 후회 없이 살자며 웃곤 했다.

자신의 위로에 웃으면서도 품 안에 사진을 채 놓지 못했다.

수많은 이들을 어둠 속에 보내고 우두커니 남아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그들의 감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거늘 이렇게 선명해질 줄 몰랐다.

감정은 선명하다 못해 가슴속에서 피어났다.

 

역시 사람의 삶은 끝나는 그 순간까지, 다 알지 못한 채 떠나는 게 숙명인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혹시 온다면 그래도 웃고 가라고.

그랬었나 보다.

그래서 놓지 못했군. 그 녀석들이.

 

열어둔 창밖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다.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많은 것을 잃어 본 사람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녀석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가져다 놔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그런가.’

 

제 아이는 이런 사랑을 받고 자랐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괴로운 법일 수밖에 없지.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에이스를 보며 웃음을 지었을 거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얼마나 소중했을까.

가뜩이나 정도 많은 자가 그 소중한 걸 잃고 얼마나 좌절을 했으려나.

감히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깊이였다.

 

거프의 뒷모습을 보던 로저가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운명은 사람을 인도하는 법.

이것 역시 삶의 일부분일 것이다.

 

차가운 안개 바람이 선실 안을 가득 채웠다.

자신까지 답지 않게 젖어 드는 감정이 들어 더 웃음을 지었다.

지금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 용서를 구하는 아이의 그것과 비슷했다.

 

나지막하게 바람을 타고 들려온 웃음소리에 거프가 괜히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머릿속으로는 에이스 녀석이 좋아했던 것들을 꺼내어 나열해 놓았다.

그런 것들은 살면서 정말 잊히지도 않는다.

같이 먹으며 웃었던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언제쯤에야 잊을 수 있을까.

갑갑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들었다.

해군함 안쪽에 있는 부엌으로 걸어가던 느린 발걸음이, 다가오는 소리에 멈추어졌다.

때마침 찾았던 모양이다.

다행이란 기색을 띄우며 부하가 황급히 말을 걸어왔다.

 

“중장님. 적입니다.”

“뭐냐. 이런 곳에 적은 웬 적.”

 

애초에 멀리서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면 자신이 느꼈을 것이었는데 적이라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감각이 둔해진 걸까.

슬슬 물러설 때가 되었다며 바다가 자리를 깔아주기라도 한 모양새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떠날 것이거늘.

 

“보아하니 저들도 이 해역에 흘러들어온 듯합니다만……. 졸리 로저를 달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겠지. 졸리 로저라고 하면 해적 말고 더 있나.”

 

신세계에서의 전투는 끝이 없다.

대 해적 시대로 인해 세상을 뛰쳐나온 해적의 수만큼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해군과 해적이 서로를 죽이려고 드는 것은 세상에서 당연한 이치였다.

그 연쇄를 누군가가 끊을 때까지 아마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별수 없다는 듯 거프가 갑판으로 나섰다.

농땡이를 피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이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이 새삼 제 선실에 있는 귀신 놈 때문이라 조금의 짜증도 치밀었다.

세상을 바꾼 그 눈으로 지금의 세상은 어떻게 비추어질지 알 길은 없다만.

분명히 술이나 마시면서 웃고 있으리란 생각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선실에 시선을 두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파도와 바람.

바다 위로 내려앉은 안개 속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왜 그러십니까. 중장님.”

 

창문 너머로 바라본 안의 풍경은 바람이 들어와 펄럭이는 커튼들만 존재감을 증명할 뿐.

조금 전까지도 분명히 있었을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고 없었다.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의문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한 채 천천히 삼키었다.

문득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지었던 그 얼굴이 떠올라졌다.

 

역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려고 하는 것 같다.

이곳에서.

 

좋지 않은 감은 언제고 잘 들어맞는 것이 세상이 정한 쓸데없는 순리 중 일부.

정말이지 저놈을 팰 수 있었다면 좋았을 터였는데.

그 생각만은 아까부터 놓지 못하며 곱씹었다.

죽게 되면 저승에서 북 대신 저 까만 머리통을 신명 나게 처 두드릴 것이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해군의 영웅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필이면 지리적으로 좋지 않으니 원. 항해 제대로 안 한 놈들은 있다가 줄을 세워라. 다들 한 대씩 맞을 각오 하도록.”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해야지, 이놈아.”

 

어디 줘보라며 부하가 들고 있던 망원경을 빼앗아 멀리 바라보았다.

안개가 껴서 깃발의 마크는 불분명하나 분명 졸리 로저는 확실했다.

펄럭이는 해골 마크를 봐온 것도 질릴 정도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곳 해역은 난파선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다. 난파선일 확률도 있겠지.”

“그렇기엔 왠지 저희 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안개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만 보일 뿐 딱히 저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쪽을 탐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하여 답답한 마음에 견문색 패기로 훑어볼 셈이었으나.

 

거프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역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도 자신들이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언가로.

 

“부하 놈들에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이야기해라.”

“예?”

“견문색의 패기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니요. 다행인 거 아닌가요?”

 

태평한 그 소리에 거프가 주먹을 들어 올려 부하의 머리를 가볍게 내려찍었다.

이래서 풋내기들이 자주 바다에 휩쓸려 죽어버린다.

패기의 기본마저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로 신세계로 향하는 배 위에 타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거기서 이제 살아남는 녀석들이 강해져 위로 올라서겠지만 제 부하들은 한참 먼 듯했다.

이것들을 언제 또 키운단 말인가.

 

“살아있는 기척을 찾을 수 없다는 소리다. 멍청한 놈아.”

 

중장의 말을 이해한 듯 그 안색들이 파랗게 변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나 안개 너머로 흐릿한 배의 그림자는 점차 이곳으로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졸리 로저에 새겨진 마크는 아직 불명확했다.

그러나 배의 형태는 조금씩 드러났다.

어디서 폭탄이라도 맞은 듯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은 서늘한 기운을 감돌게 했다.

안개는 사람의 불안감을 자아내었다.

갑판에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거프가 멀리서 다가오는 해적선을 바라보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모두가 머뭇거리고 멈출 때 더더욱 나아갔던 것이 그의 숙명.

어차피 저게 해적선이라면 문제는 없었다.

아직 별것도 아닌 풋내기 놈들에게 질 자신감은 없었다.

각오가 없는 자는 죽어 나가는 세계에서 놈들은 또 무엇을 바라고 나온 것인가.

해적왕 그 이전에 군림하고 있는 네 명의 황제들.

힘과 강함의 정점을 찍은 그들의 자리를 탐내고 아래에서 다투어봤자 위에 있는 놈들에겐 닿지 못했을 게 뻔했다.

저렇게 넝마 조각이 될 거면 살아간 이유가 있었으려나.

그것이 꿈이었나.

 

“낭만에 붙잡혀 이끌린 모양새의 완성이 저 짝인가…….”

 

역시 무너져 가는 해적선을 보는 게 불편했다.

손주가 떠올라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넘실거린 파도가 조금씩 거세어짐을 느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다가오는 기세가 좀 더 확실해졌다.

커다란 판자때기 같은 것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저 꼴이 되었음에도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가.

의문을 가졌을 때 즈음 해답은 간단히도 앞에 드러났다.

거프가 미간을 좁히며 보이기 시작한 졸리 로저 마크를 보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들어가라.”

“예?”

“나를 제외한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들어가라. 명령이다.”

 

커다란 정의라는 글자가 거세게 펄럭였다.

잔잔하던 바다에 거친 바람이 내려앉았다.

세계가 요동이라도 치는 것 같다.

바람에 따라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해군함도 파도에 흔들려 일렁거렸다.

해적선은 산산조각이 난 채 이곳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거프는 저 마크를 알고 있다.

엊그제 폭풍이 몰아치던 그 바다에서 자신이 대포알을 던지며 퍼부어 쳐부수었던 그 해적선이었다.

 

과연, 이곳은 죽음의 바다.

어째 불안하다더니 딱 자신의 직감이 맞아떨어졌다.

바다가 죽음을 이끈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이 바다를 삼킨 것이었다.

저들의 다른 것도 아닌 배는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복수라고 하려는 것일까.

나쁘진 않았다.

 

웃음을 짓는 노병을 눈치챈 부하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중장님. 중장님도 안으로 들어오시죠!”

“내가 물러서면 어쩌자고.”

“하지만 상대는…….”

“귀신이면 별수 있나. 내가 죽는지 안 죽는지 한 번 보는 수밖에!”

 

파도가 심상치 않음을 증명하듯 점차 거세게 몰아쳤다.

갑판에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떨려와 참지 못하고 부하들이 배 안으로 들어갔다.

다가오고 있는 방향으론 배가 거칠게 다가오는 파도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 위에 조금은 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지금의 상황은 환각이 아닌 현실이었다.

보기만 해도 죽음에 먹히는 것 같다.

저들에겐 형체가 없었다.

나의 죽음을 바라는 것인가.

그리 쉽게 넘겨줄 생각은 없다.

비록 많이 닳고 닳아 더는 물 수 없게 된 늙어빠진 호랑이일지도 모르겠으나.

발톱으로 찢어 죽이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몽키 D. 거프다.

 

저딴 것에는 지지 않을 것이다.

닿지 못할 것을 적으로 삼으며 노병의 눈빛이 빛났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얼마 만이었던가.

세계의 정점에 서 많은 것들과 목숨을 걸고 싸울 때도 죽지 않으리란 확신이 존재했었다.

 

“어차피 오래 살았다.”

 

닳고 닳아 망가질 때까지 어깨에 이 코트를 두르며 살아왔다.

삶이 그러했다.

도망치지 않는 것.

그것이 거프의 인생이었다.

그는 곧 영웅이었다.

 

[뭐야, 할배. 뭘 할 건데?]

“뭐긴. 이 녀석아.”

 

머릿속에 울려 퍼진 어린 손주 놈의 목소리에 주름진 얼굴 위로 웃음이 짙어졌다.

거센 파도를 따라 뛰는 심장 소리에 그는 웃었다.

가슴의 박동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울림.

살아있는 한 끝은 아닐 것이다.

 

“정 여차하면 네 놈 얼굴 보러 갈 거다.”

 

저게 진짜 귀신이고 당해낼 수 없다면 여기까지인 게지.

그 대가로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썩 나쁘진 않을 것이다.

미리 떠나간 친우 놈들에게 오래 기다렸냐며 웃고서.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면서 술을 나눠마시는 거지.

평생을 싸워왔던 놈들과 떠들어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곳에선 전쟁 따위 없으리라.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해적선은 곧바로 이쪽을 향했다.

충돌할 것처럼 가까워졌다.

어깨의 두른 코트가 날아갈 것처럼 요동쳤다.

해군함이 파도로 인하여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 기울기마저 익숙한 탓에 가볍게 자세를 잡고서 손에 패기를 두르고 눈앞에 적을 보았다.

 

적의 뱃머리가 바로 코앞.

멈추지 않을 기세로 다가오던 놈들은 이내 거프가 서 있는 갑판 뚫고서 파고들었다.

형체가 없는 것인지 배를 삼킬 것처럼 무섭게 다가왔다.

해적선이 거대한 몸으로 그를 삼키려고 들 때.

마지막까지 포기 않겠다며 영웅은 팔을 휘둘렀다.

노병에게서 일어나는 거센 바람이 파도와 맞부딪혀 해군함이 크게 진동했다.

바다는 저 주먹을 알고 있었다.

세상을 가를 것만 같은 그 커다람과 자상함.

쏟아질 것만 같던 파도가 일순간 잠잠해졌다.

 

거프는 감았던 눈꺼풀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주먹은 닿지 못했다.

 

싸울 수 없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든 찰나의 순간, 눈을 감았다.

뒤에 있는 부하 놈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녀석들이 노리는 것이 자신뿐이라면 차라리 낫지 않으려나.

죽음 너머에 관한 것은 이 나이를 들어서도 모른다.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잘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제 아들이었다.

내가 죽으면 녀석은 울어줄 것인가.

이건 해적선이 아닌 자신을 데리러 온 사자(使者)였다.

 

싹은 햇빛을 받으며 곧게 자라 나무가 되어 이내 썩어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

옳거니. 그래. 돌아가자.

 

마음속 어딘가로 무언가를 내려놓으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눈꺼풀 밖이 일순간 환해졌다.

 

마치 거대한 태양이 지나가는 것처럼 눈이 부심과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파도가 열광했다.

세계가 요동을 치는 것 같은 그것은 말 그대로 거센.

불이었다.

자신은 이 불꽃을 알고 있다.

 

뜨거울 정도로 타올라서 주위를 집어삼키는 자상함이었다.

 

‘뭘 멀뚱히 서 있는 거야. 하여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귓가를 파고든 건 처형대에서 처절하게 외치었던 그 목소리였다.

마음에서 피어나와 속을 아프게 하던 감각이 아니다.

제 가슴속을 헤집어 넝마 조각으로 찢어지게 만드는 울림과는 달랐다.

꿈속에서나 들었던 목소리였다.

환청이 아니었다.

 

“환청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려왔다.

거프는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만약 눈을 떠서.

눈앞에 있다면.

어떤 말을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헛된 생각마저 들었다.

로저 녀석이 나타난 것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도.

잠든 사이에 스쳐 지나간 일부에 불과하다면, 서둘러 깨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면 그저 지나간 악몽에 치부하고 또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에이스 놈이 없는 하루를.

 

신이 있다면 봐라. 얼마나 날 끌어내릴 셈인가. 지금 받는 벌은, 진정 내가 떠나보낸 이들의 목숨값인가.

 

좌절감에 주저앉을 것만 같아 두 발로 버티고 서있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배.’

 

심장이 저려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저 단어 하나로.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쉬지 못하겠다.

자신이 지금 어떠한 얼굴로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게 나타난 거라면 다시 올 이별의 슬픔에 울고 싶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손자의 죽음에 관하여 겁쟁이가 되었다.

영웅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거프는 처절했다.

 

셀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은 눈가를 따라 방울져 아래로 떨어졌다.

겨우 입을 열어 내뱉은 말에 절실함이 쏟아져 내렸다.

 

이것이 축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정말로. 눈앞에 있는 거라면.

멍청한 내 새끼.

 

“죽으면 보러 갈 생각을 했다. 이놈아.”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 나이 먹어서 약해지긴.’

 

그 말에 눈물을 짓눌러 참으며 눈을 떴다.

사방에 낀 안개가 제 눈 속에도 들어와 자리를 잡았나 보다.

꿈속에서만 그리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문지르고 닦아도 선명해지지 못했다.

넘쳐흐르는 눈물을 이내 참지 못하고 거프가 손을 뻗었다.

 

“에이스! 이 멍청한 녀석아!”

 

호통과도 같은 외침은 손자에게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화가 났었을 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억누르며 토해낸 말.

 

주름과 상처가 가득한 손이 손자에게 다가갔다.

예전처럼 다그칠까 봐.

혼을 내며 머리를 내려찍던 그의 주먹은 아직도 제법 선명한 탓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물러나려던 에이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손은 손주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붙잡지도 않았다.

형체가 없어 분명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었지만.

 

거프는 에이스를 품에 안았다.

 

피부로 닿지 못하는 온기를 느끼면서도 상관없다는 듯 손주를 안아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못해도 괜찮다며 손을 얹어 허공을 다독였다.

이렇게라도 안아줄 수만 있다면.

거프의 눈물이 에이스의 몸을 지나쳐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에이스가 주먹을 그러잡았다.

세상이 변해도 일어날 수 없었던 불면의 일을 겪는 것에 신이 벌을 준 것이라면 기꺼이 달게 받으리.

그 뜨거운 열에 온몸이 말라 비틀어져 사라진다고 한들 괜찮았다.

상관없었다.

 

거프의 손이 떨리는 것에 에이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울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두 번이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으로 인하여.

사랑을 받았다는 건 어째서 지나야 아는 법일까.

마주하는 얼굴들에 묻어 있던 건 제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가슴에 바다가 가득해 그것이 쏟아지고도 남을 정도로 거프의 눈물은 커다랬다.

그 물줄기가 손자의 가슴에 번져 퍼져나갔다.

에이스의 고개가 거프에게 기대어졌다.

괜찮다며 안아주는 할아버지의 손은 어린 시절 혼을 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닿을 수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기억도 못 하는 어릴 적에 느꼈을 할아버지의 품은 제법, 따스했다.

그것이 못 견디게 괴로워 속이 먹먹해졌다.

예전과 달리 야위어진 것 같은 몸에 떨어지지 않은 입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손자의 목소리도 잔뜩 젖어 들었다.

 

‘…밥 좀 먹으라고.’

“알았다, 이놈아.”

‘루피 녀석이 있으니 걱정 끼치지 말라고. 약하지 않잖아. 할배는.’

“시끄럽다. 오랜만에 만나서 잔소리는.”

 

거프는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늘 평소처럼 그렇게 보내며 웃고 떠들 재간이었다.

영원히 스무 살에 머무를 제 아이를 두고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가끔 고통스러울 뿐.

그럴 때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마음은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자신조차도.

체온조차 느끼지 못하는 손주를 품에 안으며 할아버지는 위로를 받았다.

가슴에 뚫린 구멍들이 조금씩이지만 덧씌워져 괜찮다며 거프에게 위안을 건네었다.

입술조차 움직이기 힘들 때 먼저 움직인 건 다름 아닌 에이스였다.

 

‘비켜봐. 또 오려는 모양인데.’

 

죽은 자의 불꽃이어서 그랬을까.

형체도 잡을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배를 바라보니 어느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안아주던 팔을 어렵게 내리자 에이스가 자신의 모자를 다잡았다.

 

‘할배에게 인사를 하려고 왔는데. 보지도 못하고 갈 줄 알았더니. 여긴 확실히 이상하긴 한 것 같군.’

 

에이스는 사후, 세계에 남아있는 자들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절망에 빠진 동생과. 형제와.

울음을 쏟아내는 다단과.

나로 인해 가족을 잃은 흰 수염 해적단.

그저 새까만 어둠 속에서 습관처럼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불렀고.

그 구슬픔 중에서도 제 이름을 부르며 괴로워하던 거프의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누구보다 잘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영감이.

가장 많이 아파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탓이었다.

잘 지내라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고통에 괴로워하던 에이스에게 말을 건 자는 다름 아닌 로저였다.

 

‘거프의 해군함은 곧 삼도천 근처를 지나칠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 어둠 속에서 싸늘한 표정으로 되묻는 에이스를 향해 혈육의 아버지는 변함없는 웃음을 흘리었다.

 

‘삼도천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그런 곳이니까.’

 

다 안다는 듯한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적의를 알고 있음에도 웃는 저 표정이 싫었다.

죽어서 만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린 시절부터 쉴 새 없이 생각했건만.

증오와 분노도 삶이 없는 곳에선 무의미할 뿐이었다.

 

이 쪽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로저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그래서 거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직 눈가에 눈물이 그대로 남은 거프를 돌아보며 에이스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절실했다.

쉽게 낳지 못할 상처를 준 저 자신을 원망하기 이전에 진심으로.

저 사람이 행복하길 바랐다.

비단 거프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지만.

가족은, 울지 않았으면 싶었다.

 

‘저 녀석 해치우고 난 갈 거야. 곧 이 해역을 벗어날 테니.’

“.......또 너를 떠나보내야 하는군.”

‘약한 소린 하지 말라고. 태어난 이상 다들 죽어. 알잖아.’

“그게 내 손주는 아니길 바랬던 게지.”

 

그 말에 에이스가 등을 돌렸다.

펄럭이는 바람을 따라 적의 졸리 로저가 휘몰아쳤다.

등에 새기어진 흰 수염의 마크가 새삼 선명해서 거프가 힘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건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을 너의 마음인가 보군.

그러면 되었다.

그래서 행복하다면야 나쁘지 않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모습을 바라보며 떠나보낸 이후 그 오랜 밤, 홀로 물었던 질문을 넌지시 건네었다.

 

“거기선 행복하더냐. 행복해야 한다. 에이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미워해야 할 이유도 없는 그 너머에서 넌 웃고 있었나.

제발 그러길 바랐다.

이제는 루피 녀석 걱정 없이 웃으며 태평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너머에 사랑받고 살길 바랐다.

그 마음이 와 닿아서 에이스는 더욱 거프를 볼 수 없었다.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랑을 이제 갚을 수 없어.

 

‘난.’

 

더는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없다.

 

‘…할배가 그랬으면 싶어.’

 

거짓이 없는 말은 바람에 실려 거프의 가슴께에 닿았다.

에이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으로 매섭게 전진하는 그 해적선을 향하여 주먹을 움직이니 그 끝에서 불꽃이 튄다.

열기가 맹렬하고 사나웠다.

살아있는 자의 심장과도 같아서 녀석이 살아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높이 날아오르려는 몸짓 이전에.

지나가듯이 말을 던졌다.

 

‘고마웠어. 할배. 그만 아파하도록 해.’

 

그 말은 거프의 귀에 내려앉아 글씨를 새기었다.

높이 솟아오른 불꽃은 망설이지 않고 적선을 파고들었다.

죽어서까지 다른 이를 위해서 싸움을 하는 그 뒷모습은 역시나 자상했고.

누가 뭐라 해도 제 손주였다.

그랬었다.

말은 하지 못해도 에이스의 그런 모습을 거프는 제법 자랑스러워했다.

지금 보내면 후면 세월이 흘러 또 꿈에서나 볼 테지.

혹은 자신이 죽으면 그 때 마중을 나올지도 몰랐다.

아파하지 말라는 그 말에 그간 얹어 두었던 응어리들이 풀려나가는 게 느껴졌다.

낯간지러운 말은 필요 없었다.

그런 것이 어울리는 자신들도 아니었다.

그저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하고 손주의 모습을 젖은 눈에 담았다.

앞으로는 못 볼 걸 생각하니 그것만.

쓰라리게 괴로울 뿐.

 

기다렸다는 듯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배에 잿더미가 날리었다.

까만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그 끝에 선실에서 모습을 잠시 감추었던 오랜 숙적이 보였다.

변함없이 웃는 얼굴에 그제야 눈치를 챘다.

저 얼굴은 에이스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혹시나 해서 먼저 일찍 와 있었다만. 예민하게 굴더군.’

“시끄럽다. 죽어 빠진 놈아.”

‘남은 생이라도 즐겨라, 거프. 그게 삶이다.’

 

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향해 진심 어리게 웃어주는 얼굴을 거프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것만 툭 던지고 사람을 어지럽게 만드는 꼴에도 저 사람 자체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죽었을 당시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흘리며 로저는 세상으로 흩어졌다.

저놈이 정한 꿈은 분명 세상 사람들 마음 여기저기에서 지금도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 분명할 터.

 

거프의 눈길이 손자를 향했다.

떠나간 이들을 그리며 남은 자들은 또 하루를 살아간다.

불꽃 속에 파묻힌 에이스는 이쪽을 한 번 보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한 번 피어오른 불씨는 언젠간 꺼지기 마련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손자는 이내 사라졌다.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사라진 제 삶처럼, 자신에게 덤벼들든 해적선 역시 하늘에 날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애초부터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기억에 일면으로 넘기어져 흘러간다.

모든 것이 흔적도 남김없이 떠나버렸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덩그러니 혼자 남은 이 순간은 견디어야 할 숙제이며 산이었다.

이겨내야 한다.

 

부디 그곳에선 행복해라.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해적왕이 남기고 간 말이 입 언저리에 머물러 흔적을 남겼다.

 

“그게, 인생이라.”

 

거센 파도가 잠잠해지고 안개가 점점 걷혀갔다.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은 이내 갤 것처럼 구름이 움직인다.

 

“역시나 전부 다 아는 것처럼 구는 면상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에이스 녀석이 올 거라는 걸.

본인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모르나 나란히 사라져간 부자를 보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머릿속이 조금 비워진 감각이다.

덕분에 속 안에 있던 응어리도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오랜 삶을 살며 누군가를 보내지 못해 고통을 받던 것들이 제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잠잠해 짐을 느꼈다.

 

삶은 그렇게 다시 살아가는 것이렷다.

자신이 겪은 것들이 머릿속이 장난을 내건 환각이어도 상관없었다.

앞으로는 조금 견딜 만해질 것이다.

암울함이 하늘을 닮아 푸르게 가시었다.

눈 앞에 펼쳐진 건 아득히 넓은 바다였다.

저 자신이 처음 바다에 나왔을 당시와 변함이 없는 그 파도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마치, 환영한다는 듯.

 

 

 

 

 

 

 

 

 

 

 

 

 

+)

해군 본부 선착장에 도착한 후, 거프는 진료받을 필요가 없다며 앞으로 나아갔다.

 

“잠도 잘 자고 환청도 안 들린다고. 귀찮다만.”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면서 나아가는 모습은 사람들이 예전에 알던 그 거프 중장이었다.

혈색도 더 좋아졌다.

살이 빠져 조금은 야윈듯한 모습도 점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조금 아팠어도 일반인들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체력이었건만.

생기가 넘치는 눈은 오히려 부하들을 겁먹게 했다.

훈련을 엄청나게 돌릴 것이 안 봐도 눈에 훤하였다.

 

“그치만 혹시 모르니 검사를 해보는 건…….”

“됐다, 이놈들아. 시간만 아깝게. 괜히 센고쿠 녀석에게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아 검사한다고 이야기를 해버려서는.”

 

혀를 차고 투덜대며 걸어가는 모습에 부하들이 웃음을 짓다가. 의문점이 들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센고쿠 전 원수님께요? 언제요?”

“거, 삼도천에 들어갔을 때.”

“…예? 거긴 전보 벌레 연락이 아예 먹통이었는데요.”

 

그 말에 거프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부하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이 단체로 맛없는 전병이라도 처먹었나.

 

“내가 직접 통화를 했는데 무슨.”

“애초에 거긴 해군 본부랑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연락이 안 닿습니다만.”

 

거프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렇긴 했다.

생각해보니 닿지 않은 거리였다.

거기서부터 해군 본부까지 도착을 하려면 4주는 더 걸렸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연락을 했던 놈은 누구란 말인가.

노병의 눈이 깜박였다.

그를 따라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진 곳에. 전보 벌레가 울렸다.

그 전보 벌레는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있던 해군함에서 들려왔다.

 

“어라. 저 전보 벌레. 통신을 끊어놨는데.”

 

다들 얼굴이 파랗게 새었다.

역시 삼도천에 귀신들이 따라붙은 거 아닐까.

지레 겁을 먹은 표정들을 둘러보고는 상관없다는 듯 거프가 먼저 가버린다.

새파랗게 어린 부하들은 그 뒤를 일제히 따라붙어 가기 시작했다.

꼭 엄마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들처럼.

 

한동안 해군 본부 내에서는 전보 벌레 괴담이, 센고쿠 전 원수가 전병 공장을 인수 했다는 소리 보다 더 소문 아닌 소문으로 퍼져 시끄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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