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살아가는 이유
By. 한
삐- 삐- 삐-
침대 옆에서 울리는 시계의 알림에 이불 속에서 팔이 하나 뻗어져 나와 시계의 튀어나온 버튼을 눌렀다. 다시 조용해진 방안에 따스한 햇빛이 흘러들어와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사보의 머리카락을 비췄고 그 온기를 머금은 듯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기는 사보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차갑게 죽어있었다. 그대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던 사보가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았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던 조용한 집을 다시 채우는 알림에 사보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익숙하게 식탁 위에 올려져있는 약통을 집어 약을 손바닥 위에 털어낸 사보가 냉장고에 붙어있는 메모를 하나씩 확인하며 약을 삼켰다. 그날 이후로 변함없는 메모지들 사이에 어제까지는 없었던 음식 무늬가 가득한 메모지가 사보의 눈에 들어왔다.
<10/29일 병원 상담일! 이번에는 꼭 가기! 끝나고 같이 고기 먹으러 가자, 사보! -루피->
동생의 밝은 목소리가 저절로 들리는 메모에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가를 손으로 빠르게 가린 사보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청소한 기억이 없는 집이 정리된 것을 보아 자신이 술에 취해있을 때 루피가 온 것을 짐작한 사보는 동생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나마 걱정을 덜 끼치기 위해 메모에 적힌 약속을 지키기로 한 사보는 샤워를 마치고 검은색 폴라티와 슬랙스를 꺼내 갈아입었다. 코트 역시 검은색으로 꺼내자 누군가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다가오는 예약 시간에 사보는 화장대의 의자에 코트를 걸쳐두고 습관대로 향수에 손을 뻗었다. 향수병이 손안에 들어오자 사보의 귓가에 방금 일어났는지 나른함이 묻어나는 동갑내기 형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전의 향수보다 이게 더 사보랑 잘 어울려. 너처럼 우아하고- 달달한 향이야.”
그 목소리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감촉에 사보가 빠르게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기대로 일렁거리는 푸른빛만 비칠 뿐이었다. 희망을 밟아버리는 현실에 사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손에 잡힌 향수병을 집어던졌고 파열음과 함께 행복의 향이 방안에 퍼져나갔다. 그 향속에서 사보는 결국 소리 없는 절규를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지친 사보가 멍하니 화장대에 기대어있을 때 이번에는 사보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울림에 사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거실까지 걸어 나갔고 힘겹게 핸드폰을 들어 화면의 연결 버튼을 눌렀다.
[사보님, 핸드폰 맞으신가요? 그랜드 대학 병원입니다.]
“…맞아요.”
[오늘 정신과 상담이 있으신데 꼭 나오셔야 해요. 이번에도 나오시지 않는다면 과장님께서…]
“알고 있어요. 지금 갈게요.”
과장님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떠오르는 형제의 모습에 사보는 상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꽉 쥐고 있는 탓에 꺼지지 않은 화면에는 행복했던 시절이 그대로 보였다. 그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사보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토해냈다.
“에이스…, 나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어. 약속대로-.”
그날도 로우는 그 사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며 서로 웃는 순간, 세상을 흔드는 거대한 충격과 함께 붉은색이 허공에 퍼져나갔다. 로우가 잠시 잃었던 정신을 되찾아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자 자신을 단단히 지켜주고 있는 사람의 몸에 서서히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 로우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그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평상시와 같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금방 구조대가 올 테니까….”
“하지만… 코라씨, 상처가…”
“괜찮아, 이 정도는 끄떡없다고. …로우, 사랑한다.”
그 말에 로우가 힘겹게 그 사람을 올려다보자 얼굴이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로우가 몸을 움직였을 때 그 사람은 웃으며 로우의 허리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안아 위로 팔을 뻗었다. 그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그 사람의 모습에 로우가 손을 뻗자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로우만이 위로 뻗은 그의 팔로 인해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로우를 발견한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로우가 그곳에서 벗어나자마자 그 사람은 뜨거운 붉은색에 온전히 물들어 사라졌다. 그 사람이 붉음과 하나가 되는 순간, 로우의 세상이 붉은색을 제외한 색채가 하나씩 지워져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닮은 찬란한 금빛이 회색빛으로 바뀌자 로우의 손을 타고 내려온 씨앗들이 모노톤의 거리를 붉은 꽃밭으로 만들었다. 그 꽃밭에서 가만히 서 있는 어린 로우의 귓가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를 따라 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침대 옆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알림에 자신이 오래된 꿈을 꿨다는 걸 깨달은 로우는 가볍게 화면을 밀어 알림을 껐다. 침대에서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보자 붉은 단풍이 떨어지는 회색빛의 거리에 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화면에 떠오른 일정을 바라보았다.
<10월 30일 - 그랜드 병원 내원>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로우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약통을 손에 쥐었다. 환한 회색빛이 들어오는 창문에 약통을 비춰보다가 남은 약을 모두 입에 털어 넣은 로우는 약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고 이후 16년 동안 로우는 자신을 살린 은인의 의지대로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로봇과 같이 자고 일어나 먹고 일을 하며 살아나갔다. 드라마나 영화, 책에 나오는 것처럼 격하게 힘들어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에 의외로 그 사람이 나의 곁에 떠난 게 힘들지 않은 건가? 라는 생각을 하던 로우는 손가락 사이에서 허무하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코라씨가 피웠을 때는 지금처럼 덧없고 위태롭기보다는… 오히려 순식간에 불이 옷에 옮겨붙어 타올라 소란스러웠었지.’
그때 불을 끄고 지친 서로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던 기억을 떠올린 로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했던 자신에게 비소를 지었다. 핸드폰의 시계로 진료 예약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 것을 확인한 로우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중얼거렸다.
“코라씨, 당신이 피던 담배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상담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디자인된 상담실에서 의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신의 환자를 바라보았다. 어제의 환자와는 다르게 무표정인 그는 언제나 같은 담배 냄새를 풍기며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골라 의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후, 첫 상담과 같이 가만히 책을 읽기 시작한 환자가 만들어낸 침묵과 함께 상담 시간이 흘러갔고 밖에서 상담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 소리에 그의 환자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사는 어제 유리 가면을 썼던 금발의 환자에게 했던 제안을 건넸다.
“오늘 저녁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
“이렇게 상담 시간을 보내시면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몇 시지?”
“8시입니다. 장소는 단체 상담실이고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환자에 의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비로 내려온 로우는 시간을 확인했고 6시를 가리키는 시계에 병원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근처 공원까지 걸어 나간 로우의 눈에 그 사람이 자주 사주었던 타코야키 푸드 트럭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나쁘지 않겠지.’
트럭에 다가가 주문을 하려고 하자 바쁘게 움직이는 상인에 로우가 잠시 옆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사람을 닮은 찬란한 회색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사고 이후로 색을 구별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의 햇빛을 닮은 금발이 어떤 회색빛으로 변했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우의 시선을 느낀 건지 옆을 돌아본 청년은 텅 비어버린 눈으로 로우를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타코야키가 만들어지는 소리가 침묵을 대신하는 동안 상인은 청년에게 많은 양의 타코야키를 건네주었고, 청년은 봉투를 받아들고 근처의 벤치에 앉아 타코야끼를 먹기 시작했다. 주문하지 않고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로우의 모습을 본 상인이 넉살좋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이곳에는 처음 오나 봐-. 저 청년 여기서 꽤 유명 인사거든.”
“…유명인사?"
“그래, 어떻게 저런 많은 음식을 먹는지 놀랍다니까. 형제랑 같이 오기도 하는데 그 형제도 대단하지. 무슨 일인지 요즘은 혼자 오고 있지만.”
“그런가…, 기본으로 하나만 부탁하지.”
로우의 주문에 웃으며 타코야키를 빠르게 담아 소스와 가쓰오부시를 올린 상인이 경쾌하게 로우에게 박스를 건네주었다. 값을 치르고 청년이 시야에 들어오는 벤치에 앉은 로우는 그 청년을 관찰하며 타코야키를 하나 입에 넣었다. 처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은 거리에서 그 사람과 공통점이 있는 사람을 똑같이 관찰하며 먹는 타코야키에 로우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흘렸다. 자신이 다 먹기도 전에 모든 박스를 비운 청년이 옆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에 로우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고 다시 청년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어폰을 끼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청년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가오는 모임 시간에 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는 청년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주머니에 담긴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왔을 때와 같이 원 형태로 배치된 의자에 로우는 양옆에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 앉아서 모임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단 두 자리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로우는 눈을 감고 팔짱을 끼었다. 8시가 되었는지 상담사가 들어와 남은 자리 중 하나를 차지했고 빈자리를 보더니 10분만 기다려보자고 양해를 구했다. 모임시간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거 같아 로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아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담뱃갑을 주머니에서 꺼내보이자 다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고 로우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벽에 몸을 기대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로우가 천천히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비벼 끌 때쯤 저 멀리서 이 병원의 유명한 가프 과장의 손에 아까 보았던 청년이 끌려오고 있었다. 뒤로 젖혀진 청년의 몸에서 거부가 느껴졌지만 가프 과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년을 데리고 입구에 멈추어 섰다.
“혹시 몰라서 내가 공원에 마중을 간 게 다행이지 않느냐-. 이번 상담도 잘 하고 오너라. 기다릴 테니.”
“… 알아서 하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도 돼, 할배.”
“거기, 너도 사랑하는 자를 잃은 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거냐? 이 녀석이랑 좀 같이 들어가 주지 않겠나?”
그 말에 로우는 이미 모임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그러도록 하지.”
로우의 대답에 청년은 무거운 걸음을 옮겼고 그와 함께 로우가 상담실에 들어서자 다들 이야기를 멈추고 모임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조용해진 상담실에 상담가가 참가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오신 분도 좋고 전에 오셨던 분도 좋습니다. 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변함없는 안내에 이런 일은 먼저 나서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는 로우는 손을 들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트라팔가 로우라고 한다. 주변인들은 로우라고 부르는 편이지.”
““안녕, 로우.””
“나는… 16년 전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나대신 희생한 거였지. 시간이 꽤 지나서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장례식을 치르며 결심했다.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가기로. 그 덕에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군.”
“어린 나이에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야 해서 힘들었겠어요, 로우.”
“그래도 지금은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 위로는 감사히 받지.”
로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하자 청년은 가만히 로우를 쳐다보았고 로우는 자신의 속을 파헤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덤덤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하나둘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자 마지막으로 계속 로우를 쳐다보고 있었던 청년의 차례가 되었다.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청년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로우처럼 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사보. 이곳에는 처음입니다.”
““안녕, 사보””
“6개월 전, 제 형제가… 떠났습니다. 사실 아직 믿기진 않지만 형제가 저에게 남긴 말이 있어요. 살아가라는 말. 형제의 마지막 바람을 저는 저버릴 수 없었어요. 그 뒤로 매일 그 말을 되새기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프지만…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나아질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걸요.”
“형제분이 좋은 곳에서 사보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처음 온 사보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하나둘 위로를 건넸고 그 위로 속에서 사보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감동받았다는 모습을 보였지만 로우의 눈은 한순간 차가운 기색이 감도는 푸른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 푸른빛은 로우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 연극 속에서 너도 연기를 하고 있지? 정상처럼 보여야 하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로우는 사보에게 어떠한 위로도 건네지 않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모임은 종료되었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로우가 걸어 나가며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사보는 로우를 따라 나와 어깨를 손으로 잡아 세웠다. 그에 로우가 사보를 말없이 쳐다보자 잠시 머뭇거리던 사보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말에 로우가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시야에 찬란한 회색빛이 들어왔다. 또 다시 떠오른 그 사람의 미소에 로우는 가만히 사보를 바라보다가 거칠게 돌아서며 따라오라고 대답했다. 자신과 거리를 두고 쫓아오는 사보를 확인한 로우는 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우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자 어느새 옆에 온 사보는 할로윈 특별메뉴로 만들어진 카페모카를 주문하며 자신의 카드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시간을 내주신 보답이에요.”
“…나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위해서면서 잘 꾸며내는군.”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는 투자라고 생각해주세요.”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나온 음료를 사보가 챙겨 들고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있고 구석에 자리 잡자 로우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뭐지?”
“… 어떻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죠?”
자신이 물어보고 감정이 격해진 건지 사보는 아려오는 눈가를 느끼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심호흡을 하더니 카페모카가 담긴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
“위로 한마디로 가벼워지는 무게가 아닌데 항상 멀쩡한 척, 괜찮은 척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내 앞에서 형제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흔들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말을 놓은 줄도 모르는 모습에 로우는 자신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먼저 떠난 사람도 내가 멀쩡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테니까…라는 이유가 빠졌군.”
“…맞아요. 모임에서 본 대로 당신도 저처럼 연기를 하고 있었네요.”
“편하게 말해. 존대에서 어색함이 느껴지니까.”
“그래서 로우, 내 질문에 대한 답은?”
“하, 버틸 수밖에 없지 않나? 뒤따라가면 또다시 슬픈 그 사람의 얼굴을 보겠지. 그리고 그 사람의 희생을 헛되이 할 생각은 없다. 나도 마침 궁금한 게 생겼는데 물어도 되나?”
“… 어떤 건데?”
“어디서 내가 너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아쉽지만 나는 너와 달리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거든.”
로우의 질문에 사보가 로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슬픔의 표현방법과 무게는 사람마다 달라. 덤덤하게 말하는 너의 눈 속에서 나와 같은 슬픔이 보였거든. 너도 아직 슬프잖아?”
“… 웃기는 소리를.”
로우의 대답에 사보는 시선을 돌려 카페모카에 꽂힌 박쥐 모양의 장식을 손으로 뽑아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 할로윈이네. 그 이야기 알아?”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죽은 자들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말이야. 나는 아직 한 번도 꿈에서 나온 적이 없거든. 동생한테는 몇 번 찾아와줬다는데….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든 걸까?”
“… 나한테도 찾아온 적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할 수 없군.”
“로우 있잖아, 그쪽에서 오지 않는 거면 오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처음으로 그 눈 깊은 곳에 빛이 감도는 걸 본 로우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어떻게 말이냐?”
“할로윈의 잭 오 랜턴은 죽은 자들을 안내하는 등불이래. 직접 만들면 그걸 보고 찾아오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군. 허황하지만.”
“그래도 찾아와줄지도 모르잖아?”
“… 너는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는 게 좋겠군.”
“들켜버린 건가?”
“나도 너처럼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관찰하고 싶어졌으니 어울려주지. 내일 낮 2시, 공원으로 오도록.”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로우는 시간을 말하고 그대로 카페를 나섰다. 그 모습을 사보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안에 있는 카페모카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16년 뒤면 내가 36살 인가… 이것도 일찍 왔다고 화낼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면 말리러 와줘, …에이스.”
다음날 낮, 공원.
중앙의 시계탑 아래에서 로우는 담배를 피우며 사보를 기다렸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공원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담배를 피우는 로우에게서 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사보가 발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일찍 나왔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바로 가도록 하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로우가 앞장서자 그 뒤를 사보가 따라갔다. 대화 없이 시장으로 향한 둘은 겨우 호박을 구해서 로우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자 온통 무채색인 인테리어에 로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사보가 거실에 깔려있는 돗자리 위에 앉으며 말했다.
“준비성이 정말 좋네.”
“잭 오 랜턴을 만들어서 집이 난장판이 되는 게 싫을 뿐이다. 잠시 기다리도록 공구를 가져오지.”
로우가 창고에서 준비해둔 공구를 들고 거실로 향하자 가만히 호박을 보고 있던 사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떠오르는 기억을 애써 지워내고 자리에 앉아 사보의 옆에 공구를 놓으며 잭 오 랜턴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렇게 하는 거다. 공구의 날이 날카로우니 주의해라.”
“그런 실수는 안 해.”
로우의 말에 대답한 사보가 펜을 들어 먼저 자를 부분에 표시를 한 뒤에 호박을 자르기 시작했고 익숙해 보이는 모습에 준비해둔 구급상자를 쓸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로우도 작업을 시작했다. 힘이 좋은 건지 금방 호박을 자르고 속을 빠르게 비운 사보는 로우가 호박의 속을 다 비웠을 때쯤에 잭 오 랜턴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잭 오 랜턴에 양초를 넣고 불을 붙인 사보는 말없이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로우가 잭 오 랜턴의 입 부분을 자르고 마무리를 지을 때 사보는 여전히 불꽃에 눈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항상 같이 만들었어. 할로윈이 되면 신이 나서 누가 가장 멋진 잭 오 랜턴을 만드는지 내기하자면서 일주일 전부터 매일 시장에 나가서 호박을 고르고. 이렇게 긁어낸 호박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항상 즐거웠지만 이런 기념일은 더 즐거웠어. 정말 즐거웠는데….”
사보가 두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무릎에 묻자 로우는 양초를 꺼내 자신의 잭 오 랜턴 안에 넣으며 날이 무뎌진 목소리로 말했다.
“… 나도 같이 만들었었다. 어린 나보다 더 들떠서 만들다보면 그 사람 손에서 상처가 끊이질 않았지. 엉망으로 만들어진 잭 오 랜턴을 보고 내가 한숨을 쉬면 그 사람은 멋쩍게 웃으며 다음에는 더 잘 만들어준다고 했지만…. 그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았지.”
"…오늘은 찾아와 줄까? 하는 생각으로 잠에 들어. 언제나 옆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기약 없는 기다림뿐이야.”
“그렇다고 기다리는 걸 멈출 수도 없지 않은가? 그 사람이 나를 만나러 긴 시간을 걸려 왔는데 빈 자리만 보고 돌아가게 할 수도 없고. 그 사람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보여줘야 다시 한 번 나에게 웃어주겠지.”
무릎 위에서 고개를 살짝 든 사보는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아…. 보고 싶어. 단 1초라도 좋으니까…. 오늘 이 불빛을 보고 찾아와 주겠지?”
조용했던 집을 울리는 꺼져버릴 듯한 목소리에 로우가 한번 사보를 바라보고는 다시 밝은 빛을 내는 잭 오 랜턴을 보며 답했다.
“…찾아와 줬으면 좋겠군. 올지 안 올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로우의 말이 끝나자 다시 집은 양초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가득 채웠고 둘은 가만히 양초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날이 밝자 불이 꺼져버려 싸늘해진 잭 오 랜턴과 서로의 눈을 본 둘은 서로에게 소중한 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보가 자신이 만든 잭 오 랜턴을 들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자 로우 역시 가볍게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 후 병원에서 우연히 만나거나 모임에 참여하게 되어 만날 때를 제외하고 별 다를 바 없이 시간을 보내는 둘에게 다시 한 번 가을이 다가왔다. 작년과 같은 날에 모임에 참가한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할로윈 당일, 공원의 시계탑 아래에서 만났고 이번에는 사보가 앞장서서 마트로 걸어갔다. 가지와 오이, 나무젓가락을 산 사보가 한 집으로 들어가자 그 집을 뒤따라 들어간 로우는 집을 둘러보다 이질감이 느껴져 가만히 멈추어 섰다. 로우가 집을 자세히 관찰하는 사이 오이와 가지를 손질한 사보가 로우의 이름을 부를 때, 로우는 이질감의 원인을 발견했다. 벽에 걸린 달력과 시계가 모두 멈춘 채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로우는 굳이 언급하지 않고 사보의 부름에 답했다.
“무슨 일이지?”
“저번에는 잭 오 랜턴을 만들었잖아. 이번에는 오이말이랑 가지소라고 하는 걸 만들어보면 어떨까 해서. 할배가 알려준 건데 오이로 만든 말은 망자가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의 빠른 탈것을 의미하고, 가지로 만든 소는 돌아갈 때는 천천히 가라는 의미의 느린 탈것을 의미한다고 해.”
“…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엄청 간단해. 이렇게… 다리를 만들기만 하면 되거든. 로우, 이번에는 찾아올까?”
“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게 내 대답이다.”
빠르게 만들어진 오이말과 가지소를 제단에 올린 사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향을 피우며 말했다.
“…눈치 챘지?”
“그래.”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견딜 수 없었어. 달력은 다음날로 넘길 수가 없었고.”
“그래서 저 날에 멈춘 건가?”
로우의 대답에 사보가 자신이 만든 오이말을 만지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에이스다웠어.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냉장고에 아침인사와 아침식사로 뭘 먹고 싶은지, 하고 싶은 말을 메모지에 적어서 붙이고 운동을 나갔어. 나도 평소처럼 일어나 메모지를 확인하고 있을 때 함께 운동을 하고 있을 동생에게 전화가 온 거야. 에이스가 자기를 구하다가 대신… 이라는 말을 울면서 하는데 그 말을 듣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간 나한테 전해진 건 동생을 통해 남긴 ‘미안해, 이곳에 일찍 오지는 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웃으며 살아가줘. 사랑해줘서 고마워.’ 라는 말뿐이었어. 그때까지 정말 짓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밖에서 할배랑 관계자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고라는 거야. 공사 현장에서 철근이 하나 빠졌고 그게 동생, 루피한테 떨어졌데. 그걸 에이스가 대신 맞은 거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로우에게 시선을 맞추며 사보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치실에 싸늘하게 식은 미동조차 없이 누워있는 에이스를 보는 데 가슴에 구멍이 나있는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도 여기가 똑같이 비어버린 건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더라고. 장례식이 끝나고 화장을 하는데 그제야 에이스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 체감됐는지 눈물이 나오는 데 울음소리가 안 나왔어. 당황스러운 것보다 이 생각이 먼저 나더라.
‘아, 에이스는 울보를 싫어했는데 내가 우는 소리가 안 들려서 다행이다.’
그런데 내가 울 때마다 소리를 못 내니까 사람들이 더 안타까운 눈으로 보는 거야. 그게 싫어서 앞에서는 울지 않고 웃으려고 했어. 아무렇지 않게 웃으려는데 어떻게 웃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그래서 거울을 보고 연습을 했어.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에이스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제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듣고 싶어.”
그린 듯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끝내는 사보의 모습을 보며 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자신과는 같이 살아가야하는 의무를 부여받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의무를 짊어진 모습에 부러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로우는 오랜만에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내 소중한 사람의 이름은 로시난테. 나는 코라씨라고 불렀지만. 16년 전, 내가 10살 때 코라씨와 내가 탄 차와 반대편에서 온 트럭끼리 교통사고가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코라씨가 그 짧은 순간에 나를 감쌌는지 나는 의외로 멀쩡했고 코라씨 역시 구조대가 오면 살 수 있어보였지.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어. 기름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코라씨는 그걸 보고 구조대가 나를 더 빨리 발견할 수 있게 나를 창문사이로 들어 올렸고 내가 구조대원에게 구조되어 멀리 떨어진 사이… 차가 폭발했다. 붉게 물든 그 사람과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나는 다시 의식을 놓았고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사고에 의해 나는 색채를 잃었다. 치료는 가능했지만 나는 지금도 딱히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더군. 장례식 때 한번 운 뒤로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고 나는 그런 내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왜 나는 더 슬퍼하지 않는가. 더 힘들지 않는가. 그 사람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이 생각을 들킨 덕에 병원에 강제로 다니고 있지만 나의 의문에 아무도 내가 만족스럽게 대답해주지 않더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로우의 모습에 사보는 자신이 지었던 미소를 얼굴에서 지워내고 탁자 위에 엎어져있는 액자를 보면서 답했다.
“그 답을 코라씨라는 사람은 알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 없으니 알 수 없겠지.”
“…그렇지. 우리가 물어보러 찾아갈 수 없으니까.”
사보의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집 안의 적막 속에서 어둠이 찾아오자 사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술병을 가지고 로우에게 내밀었고 로우는 차가운 술병을 받아들었다. 어둠의 유혹을 잊기 위해서 둘은 잠시의 도피를 선택했고 다음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이번에도 오지 않은 그리운 사람의 발걸음에 둘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된 덕인지 아니면 상담이 진행됨에 따라 자주 마주쳐서 그런지 둘은 만날 때마다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모임 후에는 처음 만났던 카페에서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가끔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9월의 마지막 모임 날 둘은 자연스럽게 아메리카노와 카페모카를 시켜 구석 자리에 앉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